상처받은 자연인 나를, 하나님을 맛본 신앙인 내가
달래고 가르치고 설득하는
긴 싸움을 그렇게 이어갑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주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신학을 사랑하는 사람은
수백 년 전 문서 한 웅큼 들고 서서
현실교회에 대하여 비평과 비난,
그리고 훈수 넘쳐나는 선생노릇으로 일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신학자는
현실교회의 문제와 약점을 고민하고 교감하며
대안을 내려고 괴로워합니다.

정암 박윤선은 나의 스승입니다. 사실 그는 나 뿐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직간접으로 한국교회의 수많은 목회자들의 선생님입니다. 곁에 손잡고 함께 있지 않아도, 눈앞에 얼굴 마주 보고 있지 않아도, 그 어른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르침이 되는 선생님을 가슴에 품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복입니다. 그 선생님 생각이 나면,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고 자기성찰이 되고, 그 선생님을 떠올리면 나도 그렇게 살아봐야지 하고 격려가 되는 어른을 우리가 사는 동안 다만 한 두 분이라도 마음에 품고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어느 정치평론가의 말대로
“‘본 대로’ 기록했다고 사실이 되는 것도 아니고,
‘들은 대로’ 말했다고 진실이 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눈으로 보았으며,
어떤 귀로 들었고,
무엇을 근거삼아 결론을 내렸는지,
그것이 문제다.

예수님은 마지막 고별설교에서
선생님이 죽는단 말씀 듣고
근심에 빠진 제자들에게
기도하란 말씀을
네 번이나 하셨다.

근심에 빠진 건 그 때 그들만이 아니다.
오늘 우리의 근심은 더 깊고 더 크다.
문제의 해결에 살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 살 길이 있다.

일상화된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마음의 거리 두기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영적 거리두기로
우리를 몰아가게 될까봐
걱정이 앞을 가립니다.

나는 그 쪽지를 들고 당시 한창 연애 중이던
지금의 아내에게 달려갔다.
어머니께서 신학교 가는 것을 허락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다.

우리는 둘이서 그 쪽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때 어머니께서 일러주셨던 시편의 그 말씀은
우리 부부가 평생 사역자의 길을 걸어오면서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마다 언제나
다시 돌아가 붙잡고 버티는 버팀목이 되었다.

한국기독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 가운데 하나는 외국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이미 성경이 먼저 번역되고 보급되었다는 사실이다. 개신교 선교사가 최초로 한국에 들어온 것은 1884년 이었다. 그러나 한국어 성경 번역은 그 이전에 만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후에 일본에서도 이루어졌다. 만주에서 성경번역에 참여한 한국인 번역자들은 그 이후 성경을 국내에 들여와 보급할 뿐 아니라, 성경 말씀(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우리는 지금
열린 세상에서 닫힌 세상으로,
닫힌 세상에서 다시
갇힌 세상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아침에 생각하니
어제가 고난주간 수난일 이었던 것을
종일 잊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수난일도 잊고
금식은 커녕 고기까지 먹고…
죄책감도 들고, 내가 참 한심하단 생각도 들고,
사람보기도 미안하단 생각도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