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어느 시절부터인가 몸에 배어 있었다.
그런데 자녀들에 대하여도 그 확신이
몸에 배게 되었다.

그런 마음이 몸에 배인 탓인지,
아이들이 지독한 어려움에 힘들어할 때,
어떤 힘도 해결책도 될 수 없는
무능력한 아빠이기 일쑤였지만,
그래서 속수무책으로 아이의 하소연과 신음소리를
듣고만 있어야 하는 무기력한 아빠였지만,
마지막에는 늘 그렇게 말하곤 했다.

설교자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다리를 놓는 사람입니다.
설교자의 다리 놓기는
본문에서 만나는 “낯선 신세계”와
청중이 살아가는 “지금 이곳”의 세계를
연결하는 일입니다.

지금이 어떤 시국인데 신학자라는 사람이
개인적인 감상에 빠져
영양가 없는 이딴 소리를 늘어놓아
민폐를 끼치냐고요?

글쎄요.
교회가 닥친 현상을 보며
속이 답답하고, 앞일도 막막한데,
장대비까지 퍼부으니,
갑자기 돌아가신 우리 엄마 생각이 났습니다.

내일도 주일인데…
이 땅의 목회자들을
응원합니다.
파이팅!

신자에게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경우란 없다.

신자가 다른 사람을 품고 기도하는 것은
해줄 것이 없으니 그것이라도 하는
최소한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최상의 것이다.

모두가 불안하고 힘든 지금은,
어쩌면 서로를 품고 기도해주며
우리의 부요함을 마음껏 발산할
절호의 기회일는지 모른다.

우리는 나누어줄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

세상이 이런데 언제까지 이러실 거냐고 따져 묻는 하박국에게 결국 하나님은 이렇게 되물으신 셈이었다. 세상이 이런데 너는 어떤 길을 갈 거냐고. 악인들로 세상이 뒤집어지고 있을 때 너는 어떤 길을 갈 거냐고. 그리고 하나님이 스스로 주신 답은 그것이었다. “의인은 그래도 제 길을 간다!” 세상이 어떻게 뒤집어져도, 신자는 여전히 제 길을 간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이 하라 하신 『기도』는
예수님을 다시 만날 때 까지
떨어져 살아야 할
제자들에게 주시는
생존의 방편이다.

기도는 단순히
신앙의 덕목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목사의 답에 대한
신학적 입장이 달라서가 아니라,
이 상황에서 그가 취한
철저하게 비인간화 되고
매정하게 객관화 된
그 목회자의 태도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그 후로 나는, 목회란 무엇인가,
목회자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상황에 대처하는 우선적 반응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놓고
오래고 깊은 고민을 했습니다.

명분이 확실한 그들의 요구는, 그들이
이렇게나 합리적이고, 논리가 치밀하고,
기획력이 완벽하고, 준비성이 철저한
유능한 지도자들이란 증거가 아니었다.
하나님을 그렇게나 못 믿고 있다는
불신앙의 증거일 뿐이었다.

하나님 자신의 해석에 의하면
그것은 불신앙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멸시하는 악행일 뿐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진노하신 것이다.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 내 귀에 들린 너희 말 그대로
몇 년이 걸리든 이 들판에서 다 죽게 해주마!”

“말을 잘 들어주는 연습이 필요해.
고쳐주려 하지 말고,
들어주려 해봐.
그러면 친구가 돼.

말도 안 되는 얘기인데도
끄덕이며 들어주니까 친구이고,
맞는 말인데도 시비만 거니까
원수가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