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충격적인 반전은 이것입니다. 현대문명이 이룬 세계화를 발판삼아 코로나 한 놈이 팬데믹이라는 타이틀을 얻으며 세계를 통일하니, 그간 이룬 위대한 세계화가 일순간에 무효가 되어버렸습니다. 나라마다 장벽을 세워 오갈 수 없고, 개인마다 거리를 벌려 접촉할 수 없습니다. 철저한 지역화, 지독한 개별화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봉쇄라는 이름으로 서로 넘나들 수 없고, 격리라는 이름으로 밖으로 나댈 수 없는 것이 일상인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막히고, 자기 자신에게는 갇히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 현실에서 확인하는 가슴에 사무치는 사실은 이것입니다. “별 수 없는 인생!”

현상의 아픔, 고통, 슬픔, 두려움, 답답함, 원통함을 토로하는 것이 새로운 판으로 가는 출발점이요, 소망으로 가는 시작점이다. 아프다고 말하며 실컷 울라. 답을 모르겠다고 하소연하며 다시 울라. 하나님 어디 계시냐고 울며 하소연을 하라. 그렇게 답답하고 쓰린 마음을 실컷 털어놓으라. 그것이 가장 중요한 첫 출발점이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신앙적이고 싶은 욕구가 너무 강한 나머지 하나님께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는 새 출발의 현장을 무시하거나 지나쳐버리는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잊혀지는 일에
익숙해지는 연습을 해야 해요.”

수년 전에,
은퇴를 얼마 남겨놓은 존경하는 목사님이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하신 말씀이었습니다.

평생 목회한 초대형 교회 은퇴를
그런 맘으로 준비하며
당신 자신을 채비하는 말로 들렸습니다.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나도 미리 한 수 배웠습니다.

나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어느 시절부터인가 몸에 배어 있었다.
그런데 자녀들에 대하여도 그 확신이
몸에 배게 되었다.

그런 마음이 몸에 배인 탓인지,
아이들이 지독한 어려움에 힘들어할 때,
어떤 힘도 해결책도 될 수 없는
무능력한 아빠이기 일쑤였지만,
그래서 속수무책으로 아이의 하소연과 신음소리를
듣고만 있어야 하는 무기력한 아빠였지만,
마지막에는 늘 그렇게 말하곤 했다.

설교자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다리를 놓는 사람입니다.
설교자의 다리 놓기는
본문에서 만나는 “낯선 신세계”와
청중이 살아가는 “지금 이곳”의 세계를
연결하는 일입니다.

지금이 어떤 시국인데 신학자라는 사람이
개인적인 감상에 빠져
영양가 없는 이딴 소리를 늘어놓아
민폐를 끼치냐고요?

글쎄요.
교회가 닥친 현상을 보며
속이 답답하고, 앞일도 막막한데,
장대비까지 퍼부으니,
갑자기 돌아가신 우리 엄마 생각이 났습니다.

내일도 주일인데…
이 땅의 목회자들을
응원합니다.
파이팅!

신자에게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경우란 없다.

신자가 다른 사람을 품고 기도하는 것은
해줄 것이 없으니 그것이라도 하는
최소한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최상의 것이다.

모두가 불안하고 힘든 지금은,
어쩌면 서로를 품고 기도해주며
우리의 부요함을 마음껏 발산할
절호의 기회일는지 모른다.

우리는 나누어줄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

세상이 이런데 언제까지 이러실 거냐고 따져 묻는 하박국에게 결국 하나님은 이렇게 되물으신 셈이었다. 세상이 이런데 너는 어떤 길을 갈 거냐고. 악인들로 세상이 뒤집어지고 있을 때 너는 어떤 길을 갈 거냐고. 그리고 하나님이 스스로 주신 답은 그것이었다. “의인은 그래도 제 길을 간다!” 세상이 어떻게 뒤집어져도, 신자는 여전히 제 길을 간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이 하라 하신 『기도』는
예수님을 다시 만날 때 까지
떨어져 살아야 할
제자들에게 주시는
생존의 방편이다.

기도는 단순히
신앙의 덕목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목사의 답에 대한
신학적 입장이 달라서가 아니라,
이 상황에서 그가 취한
철저하게 비인간화 되고
매정하게 객관화 된
그 목회자의 태도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그 후로 나는, 목회란 무엇인가,
목회자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상황에 대처하는 우선적 반응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놓고
오래고 깊은 고민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