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

성령을 주제로 한 설교실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
고후 6:14-7:1

이승진 교수
(합신 설교학, 설교자하우스 지도교수)

본문연구

성령 하나님에 관한 주제를 설교하려면 설교자는 어떻게 준비하여 전달할 것인가? 이 글에서 필자는 성령님에 관한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설교자가 미리 염두에 두어야 할 설교의 목적과 성령론에 대한 조직신학적인 배경지식, 그리고 성령 하나님에 관한 성경신학적인 관점의 필요성에 대하여 언급하고, 이어서 구체적으로 고린도후서 6장 14절-7장 1절로 성령 하나님에 관한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 대해서 소개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실제 설교문을 제시하고자 한다.

성령 하나님에 관한 주제를 설교하기 전에 설교자는 이 주제를 지속적으로나 시리즈 설교 형태로 설교하려는 설교의 목적을 분명히 확정해야 한다. 설교자가 성령 하나님을 설교의 중심 주제로 다뤄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신자가 신앙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실제로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구속을 신자 개개인에게 적용하시는 주체가 바로 성령 하나님이기 때문이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30번, 딛 3:5). 삼위 하나님 중에서 특별히 성령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신 구원을 특정한 신자의 마음과 삶과 교회에 개별적으로 적용시키시며, 이런 목적을 위하여 신자 안에 내주하시고 동행하신다(요 14:7; 롬 8:9; 고전 3:16; 딤후 1:14). 그래서 현재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향유하는 신자의 입장에서는 자기에게 내주하시며 자신의 구원과 신앙생활을 견인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어떤 분이고 지금 자기 속에서 무슨 일을 이루어 가시는지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위해서 필수적이다.

성령님에 대한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두번째로 신자의 삶 속에서 성령 하나님이 감당하시는 구원 사역에 대한 조직신학적인 배경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신자의 구원과 신앙생활의 전체 과정은 성령 하나님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신자의 구원의 전체 과정은 먼저 중생(요 3:5)으로부터 시작하여 회개(행 11:18), 칭의(고전 6:11), 양자됨(갈 4:4-6), 구원의 확신(롬 8:16), 믿음(고전 12:3), 인내(엡 4:30), 그리고 성화(살후 2:13)로 이어진다. 그리고 구원의 전체 과정은 철저히 성령 하나님이 개입하여 일어나는 사역이다. 이렇게 신자의 구원의 전체 과정은 성령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인 동시에, 신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영적인 사건을 신자 스스로 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여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성령님에 대한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셋째로 성령 하나님에 대한 성경신학적인 이해를 갖추어야 하며 성령 하나님에 관한 성경신학적인 쟁점들을 미리 연구해야 한다. 성령 하나님에 관한 성경신학적인 쟁점들로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이후의 신자의 성령충만을 위한 범례적인 사건인가, 아니면 구원의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버금가는 단회적인 사건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 외에도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차이점이나,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가시적인 증표들, 그리고 성령충만과 신자의 감정이나 정서의 연관성 등등이 있다.

성령론에 대한 조직신학적인 토대와 성경신학적인 토대를 갖추고 목회 현장에서 성령론에 관한 주제설교를 전하려는 목회적인 목적을 정한 다음에는, 그러한 목적에 합당한 성경 본문을 선정하고 주해작업을 시작한다. 구원의 전체 과정에 대한 이해를 심어주려는 목적으로 본문을 정하려면 성령론에 관한 조직신학 서적들을 참고하여 해당 본문을 선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또 신자가 추구해야 할 성령의 열매에 관한 성품이나 덕목에 관한 설교를 위해서라면 갈라디아서 5장 22절이나, 강력한 성령의 역사에 대한 기대감을 위해서라면 사도행전 2장 이하의 본문도 추천할만하다.

필자는 구원의 전체 과정 중에서 특별히 신자의 성화를 위한 성령의 내주와 동행에 관한 주제설교를 통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정결하고 거룩하게 변화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내면과 삶 속에 간섭하시고 인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동행을 인식하도록 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목적에 부합하는 성경 본문 중의 하나가 고린도후서 6장 14절 – 7장 1절이다. 이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내의 신자들이 불신자들과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구별이 되지 않는 방탕한 삶(고후 7:1,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을 살아가는 모습들에 대해서도 복음으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하는 필요성을 느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특별히 제시하는 신자의 중요한 정체성은 그들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강림하시고 내주하시는 성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의 주해적인 중심사상(exegetical main idea)은 “신자는 성령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에 불신자와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로 정할 수 있다. 주해의 중심사상이 결정된 다음에 설교자는 회중이 이 중심사상을 효과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설교 전체의 개요(outline)를 구상하고, 전체 개요의 흐름 속에서 회중이 설교의 중심사상에 동의할 수 있도록 하는 수사적인 전략을 모색한다. 필자는 아래의 설교문의 서두에서는 먼저 한국교회가 직면한 문제점을 제시하고 설교의 본론에서는 그에 대한 해답으로서 신자의 신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성령의 동행하시는 사역으로 말미암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성전으로 변화되었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이러한 영적 변화에 근거하여 신자가 불신자와 구별된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함을 역설하고자 한다.

설교문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한 한국교회
한국사회 속에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존경과 신뢰감이 점점 흔들리고 있습니다. 어떤 장로님은 지금 한국교회를 가리켜서 2천년의 개신교 역사에서 최대로 부패한 교회이고, 세속적인 탐욕과 물신에 찌들어서 붕괴 직전의 최대 위기 상황에 직면했다고 평가했습니다. 2천년 교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교회가 타락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러 죄악을 범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한국교회를 2천년 전체의 교회 역사와 비교해 볼 때, 지금 한국교회가 가장 타락했다, 이런 평가는 다소 객관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한국교회의 영향력을 평가할 때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 전해졌을 때에 비해서, 그리고 여기에 계신 어르신들이 예전에 2, 30년 전에 신앙생활을 하실 때 비해서, 오늘날 한국교회 전체의 영적인 수준이나 사회적인 영향력이 상당부분 약해진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직장에서 존경과 신뢰를 얻지 못하고 신자들이 사회에서 직장에서 당당하고 떳떳하게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자랑하면서 신앙생활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 이유들이 있겠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선포하지 않기 때문이고,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기 때문이고, 또 신자들이 무엇보다도 삶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다른 거룩함과 정결함과 도덕적인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신자라면 예수 믿는 신자답게 실제 삶 속에서 그의 언어생활 속에서, 행동 속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구별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동안 예수를 마음 속에서 구세주로 믿고 받아들이고 복음을 이해하는 차원은 성공했지만, 그 예수와 복음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정결한 삶, 구별된 삶, 거룩한 삶으로 보여주는 데는 실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뭐 세상 사람들 앞에서 거룩한 삶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 믿는가? 도덕과 윤리를 보여주기 위해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옳으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좋고 복음이 너무나도 복되고 좋은 소식이어서 그대로 믿고 신앙생활하는 것이지, 남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자랑하고 과시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가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우리 마음 속에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면 그 삶은 세상 사람들과 절대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리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은 결국 우리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도 사람의 힘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절대적인 차이를 가져올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6장 14절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마십시오”라고 단호하게 권면합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신명기 22장 10절에 “소와 나귀를 한 멍에에 매어서 밭을 갈지 말라”는 말씀을 염두에 두고 교훈한 것입니다. 소도 밭을 갈아엎는 쟁기를 끌기 위해서 멍에를 매고 밭을 갑니다. 나귀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와 나귀를 한 멍에에 매어서 밭을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소와 나귀가 걸어가는 보폭도 다르고 멍에를 매는 높이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둘을 한 멍에에 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불합리한 일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자와 불신자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똑같은 삶을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신자가 살아가는 방식은 필연적으로 불신자가 살아가는 방식과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신자들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말씀을 주로 불신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뜻으로 많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결혼 적령기에 도달한 청년 신자들은 결혼 조건을 따질 때 신앙 여부를 매우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그렇게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서는 아주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한국교회 신자들이 한국사회를 변화시키고 선도하는 개혁의 주도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먼저 너희들이 바뀌어라!”고 지탄을 받고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한 상황에서, 이 말씀은 단순히 불신자와 결혼하지 말자는 의미로만 이해하기 보다는 “불신자들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좀 더 적극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라면 불의한 세상 사람들과는 무언가 다른 삷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그러면 예수 믿는 우리는 어떻게 그런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신자가 불신자와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신자 스스로 내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자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실 때 예수 믿는 신자는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여 그 속에 내주하시고 머물러 사시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사도 바울이 신자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표현하는 서신은 오직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뿐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 이하에서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그런데 저와 여러분과 같은 신자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씀을 어떤 분들은 그저 익숙하게 들으실는지 모릅니다만, 이 말씀을 처음 들었던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충격적으로 들렸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이 강림하시고 또 머물러 거주하시는 건물로서의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거룩하고 위엄이 서린 특별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 성전은 먼 옛날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특별히 성령 하나님의 지혜와 감동으로 하나님이 직접 설계하여 지어졌을 뿐만 아니라, 성전이 완공된 직후에는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신 것을 상징하는 구름이 성전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왕상 8:10; 대하 5:14). 그렇게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 차 있어서 당시 제사를 주관하던 제사장들은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에 혹시나 누가 되지는 않을까,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그 불꽃같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신의 죄성이 충돌하여 혹시나 죽지는 않을까 하는 경외심과 두려움과 떨림으로 압도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서서 감히 제사를 주관하면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할 정도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왕상 8:11).

그 이후로도 성전 중에서 특별히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가 놓여 있었고 그 언약궤 위에 시은좌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임재를 상징하는 공간이었고,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들이라도 감히 접근하는 것이 두려울 정도입니다. 성전 중에서도 특별히 이 지성소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공간이기 때문에 레위기 16장 2절에서는 분명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성소의 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고 말씀합니다. 왜 이스라엘에서 참으로 거룩하고 정결한 제사장들이라도 지성소에는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고 말씀합니까? 그것은 참으로 거룩하고 정결한 제사장들이라도 모두가 다 죄 많은 죄인들이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충돌하는 순간 즉사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과 사람은 생명과 사망이 완전히 다를 정도로 그렇게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입니다. 같이 있으면 결국은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모신 성전이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성소에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그 속에서 참으로 거룩하시고 죄는 조금도 없으신 하나님과 충돌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두렵고 떨리는 공간이지만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오직 대제사장만이 그 지성소에 들어가서 온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 제사를 드리도록 하였습니다(레 16:1-34). 대속의 피를 의지해서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빌고 두려워 떠는 심정으로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지성소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무슨 일이 발생했습니까? 그 분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의 더러운 죄가 씻겨 내려갔습니다. 우리 죄가 씻어지고 우리의 죄악이 사함을 얻고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존재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사도 바울에 의하면, 예수 믿는 신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여 내주하시며 우리 안에 함께 머물러 지내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사함을 받은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구약 시대 커다란 벽돌로 지어진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처럼 그렇게 자랑할 것이 없고 내세울 것이 없는 저와 여러분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독생자의 보혈로 세워진 성전
무엇 때문에 이런 엄청난 일이 발생한 것입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을 씻어내기 위한 보혈이 저와 여러분 위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 제사장이라도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수송아지와 수양으로 속제 제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대제사장이라도 자기 죄를 대신 용서받기 위한 속죄 제물에 의지해서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 죄악을 용서받았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예수 믿는 우리는 주님의 보혈로 죄용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여 머물러 내주하시는 성전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에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용서받고 나서 이제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라고 말씀하면 전혀 기대하지 못했다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조금 막연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신자 개개인을 하나님이 친히 머물러 내주하시고 동행하시는 성전으로 삼으시려는 것은 구약시대 성전이 지어지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의 작성 속에 들어 있었고 이미 구약시대에서도 하나님은 반복적으로 계속 이 계획을 약속해 오셨습니다. 그 구약의 약속의 말씀들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16절에서 인용하여 다시금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지기 전에 출애굽기 25장 8절에서도 하신 말씀이고, 이후에도 레위기 26장 12절이나 사무엘하 7장 14절에서도 여러 번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25장 8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짓도록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들 중에 거할 성소는 문자적으로 본다면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되고 나서 솔로몬은 열왕기상 8장 27절에서 기도 가운데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이 역사를 주관하시고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거룩하신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이 감히 이 조잡한 벽돌 건물을 자기 집으로 삼아서 머물러 지내신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이야기냐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한하시고 이 온 우주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설령 예루살렘 성전에 그 속의 지성소에 잠시 하나님이 임재하셨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2천년이 지난 지금 예루살렘 성전에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말이 안 되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출애굽기 25장 8절에서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짓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돌을 깎아서 예루살렘에 건물로 지어진 성전은 말하자면 먼 훗날 모든 성도들의 마음 속에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이들을 성전 삼으실 날을 미리 예언하고 교훈하고 교육하기 위함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짓도록 성령을 통하여 장인들에게 지혜를 주시고 감동하셨던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믿는 저와 여러분이 직접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모든 신자들이 직접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성전
그런 놀라운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능력이나 지혜로 되는 일이 아니라 바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 우리 신자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하면서 동시에 우리 안에 머물러 내주하시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신자들 속에서 많은 일들을 하십니다. 예수의 복음이 믿어지도록 하시고 그 복음의 빛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죄악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의 빛으로 우리 죄악을 바라보고 그 무시무시한 파괴력에 두려움을 갖고 그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오직 성령의 역사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시면서 우리가 얻은 구원에 대해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흔들림이 없이 주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교훈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정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이 임재하여 내주하실 수 있도록 우리 내면의 죄악을 예수의 보혈로 정결하게 씻어 주시는 것도 성령의 역사이고 또 이후에 하나님이 떠나가지 않으시도록 우리가 늘 죄악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분도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믿지 않는 불신자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말씀하시고 또 그런 분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분도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믿어 구원받은 신자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서 매일 매일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 나가서 직장에서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떳떳하고 당당하게 밝히면서 신앙생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불신자들과 구별된 거룩하고 정결된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도덕적으로 저들의 본이 되고 저들 앞에서 윤리를 선도할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라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신 안에 성령 하나님이 내주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를 저 세상에 우뚝 선 영광스러운 성전으로 삼으셨음을 믿으시고 정결하고 구별되며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성전다운 삶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승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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