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탐구와 설교 작성

성령강림절 7주간 시리즈설교(4) 제3주

* 설교를 위한 제안
매주일 독립된 주제로 한편씩 설교를 하는 것으로 성령강림절 7주간 설교 시리즈를 진행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번의 설교로 다루는 것이 시간이나 분량으로 벅찬 주제인 경우에는 특정의 주제를 2,3회의 시리즈로 나누어서 설교할 수 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한 주제가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성령의 은사에 대한 내용을 한편의 설교로 다 다루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편의 설교로 다룰 수 있는 내용만큼만 요약적으로 다루면 자칫 성령의 은사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단편적이거나 피상적으로 다루고 끝나기 쉽다. 그러므로 2-3회에 나누어서 성령의 은사에 대한 가르침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이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설교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설교를 위한 지침
아래의 내용은 “평신도 신학강좌”로 어느 교회에서 행한 성령의 은사를 주제로 행한 강의내용이다. 많은 분량의 내용이므로 이것을 참고하여 2-3편의 주일설교로 재구성하여 이번 기회에 성령의 은사를 주제로 한 2-3화의 시리즈 설교를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의 은사란 무엇인가? 성령의 은사는 누가 주는가? 성령의 은사는 왜 주시는가? 성령의 은사는 언제까지 유효한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가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등등의 관점으로 성령의 은사를 풀어나가면서 성도들의 실생활과 연결 짓는 방식으로 설교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주제 강해실제

제목 : 신자의 삶과 성령의 은사
본문 : 고전12:8~11

고린도전서 12장은 사도 바울이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말하는 대표적인 본문입니다. 물론 고린도전서 14장과 로마서, 그리고 에베소서에서도 은사에 대하여 말씀했지만 오늘 본문에서 가장 소상하게 성령의 은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갑자기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이렇게 길게 말하는가? 그 배경을 우리가 잠깐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편지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매우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던 교회입니다. 분파의 문제가 있었고, 서로 잘났다고 싸우는 문제가 있었고, 이혼의 문제가 있었고, 성찬의 문제가 있었고, 성적부패, 도덕적 문란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은사의 문제로 서로 자기가 맞고, 뛰어나다고 싸우는 등 문제가 있었습니다. 누가 더 잘났는가, 누가 한 일이 더 귀한 일인가, 누가 더 신앙이 높은 것인가, 누가 한 일이 더 가치가 있는 일인가, 누가 하는 일이 더 큰 일인가 라는 문제로 갈등과 다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교회에서 은사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세히 가르쳐야만 될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도 동일하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가르친 성령의 은사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확인하고 아는 것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오늘은 신자의 삶과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1. 성령의 은사란 무엇인가?

성령의 은사란 무엇인가를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

은사란 하나님이 신자에게 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 말 안에 중요한 핵심이 다 들어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성령의 은사는 누구에게 주는 것인가? 신자에게 주십니다. 은사를 주시는 근거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 이야기를 고린도전서 12장 1절부터 시작합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고전 12:1)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첫마디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신령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말이 꼬이고 어려운 것 같지만, 쉽게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말은 신령한 것에 대한 말이다. 너희가 이 일을 알기를 원한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내가 지금부터 신령한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너희가 이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 신령한 것을 뒤에 있는 말과 연결지어보면 이것은 성령의 은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다음에 2절부터 3절 말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2~3).

한 마디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너희가 이전에 있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전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이방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우상에게, 말 못하는 우상에게 이끌려 다녔습니다. 쉬운 말로 하면 ‘이전에 불신자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다고 합니까? ‘예수를 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주라고 말하고 있는 지금과 다른 세력의 지배를 받아서 이끌려 다녔던 이전 시대 사이에 뭐가 있다고 합니까? ‘성령이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게 만드는 일’이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 말씀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고, 그래서 구원받은 신자가 된 사람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는 이방인이나 불신자나 우상을 섬기는 자들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며 사는 신자들과 관련된 것입니다. 즉 성령의 은사는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며 구원 받은 신자의 신분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신령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에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신자 500명이 있다면 이 가운데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모두 몇 명이나 될까요? 당연히 500명이지요. 성령의 은사는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특별하게 열심이 있는 사람, 특별하게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 특별하게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을 뽑아서 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사람들에게 준 것이라고 말씀하니까요. 그러므로 내가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것이 분명하면 나에게도 성령의 은사가 주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나는 예수 믿은 지가 20년인데 아직도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했어.’ 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그 다음 4절부터 6절의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4~6).

은사, 직분, 사역, 같은 말을 바꿔가며 쓰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 그 다음에 ‘교회의 직분’, 그 다음에 신자로서 행하는 ‘사역’, 이것들이 다 성령의 은사와 관련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은사는 여러 가지입니다. 직분도 다양합니다. 사역도 제각각 다릅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행하도록 은사를 주시는 분은 동일합니다. 같은 성령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셔서 직분도 행하고 사역도 실행하게 하십니다.
요약하면, 성령의 은사란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구원받은 신자로 살아가도록 성령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사하면 특별한 것, 희한한 것, 신비한 것, 비범한 것, 몇 사람에게만 특별히 주어지는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은사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첫마디부터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서 해 봅시다. “나는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라고, 직분을 수행하라고, 사역을 감당하라고 성령이 나에게 은사를 주셨다.”

2. 은사의 종류

은사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은사의 종류에 대해서는 본문만이 아니라 로마서와 에베소서 그리고 베드로전서에서도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은사는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8절부터 10절까지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 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 12:8~10)

지혜, 지식,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 영들 분별함, 방언 말함, 방언을 통역함. 이게 다 은사입니다. 그 다음 28절에서 29절까지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고전 12:28~29).

은사에 관한 다른 말씀들도 찾아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6~8).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엡 4:11).

그러면 은사의 종류는 몇 가지나 될까요? 어떤 분들은 은사의 범위를 세 가지로 나누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열일곱 가지, 어떤 사람은 열아홉 가지, 어떤 사람은 스물 세 가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제시한 이런 은사들은 규범적인 목록이 아니라 예시적인 나열입니다. 성경이 열거하는 은사들은, 그 종류를 망라하여 이것이 은사의 전부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은사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것을 예시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은사는 아주 많이 있는데, 예를 들자면 이거, 이거, 이거지.”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목록을 다 뽑아보니 23가지다, 결국 성령의 은사는 23가지밖에 없다는 뜻으로 말씀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로서 살아가고, 맡겨진 직분을 감당하고, 신자로서 행해야 될 사역을 수행하도록 성령님께서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모든 신자들에게 주신 것이 성령님의 은사인데, 그것이 23가지 밖에 없을 리가 없지요? 수없이 많다는 말입니다.
성령님의 은사는 얼마든지 다양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 7절은 “각 사람에게”, 베드로전서 4장 10절에도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로마서 12장에도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라고 했습니다. 각자에게 주시는 성령님의 은사가 다양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23개 은사 목록 펴 놓고 “나는 이 은사 가질래!” 하고 뽑아서 “이 은사 주세요!” 그러는 게 아닙니다.

3. 은사의 상호관계 : 은사의 통일성

그러면 각자에게 주신 각각 다른 은사들은 서로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저는 가르치기를 잘하는 은사를 받았는데, 홍 목사님은 사람을 상담하고 마음을 치유하는 은사를 받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사람을 가르쳐서 말씀을 깨닫게 하는 저의 은사와 사람을 치유하고 세워주는 홍 목사님의 은사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이 집사님이 가지고 있는 은사와 저 집사님이 가지고 있는 은사, 이 다양한 은사들은 서로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 말입니다. 그것을 은사의 통일성이라는 말로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4절에서 27절을 보겠습니다.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 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14~27).

긴 말씀이지만 제가 쉽게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몸을 가지고 은사를 설명합니다. 우리 몸이 있습니다. 몸에 팔이 있고,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코가 있고, 발이 있고, 엄지발가락이 있고, 새끼발가락이 있습니다. 그런데 귀가 있다가 “야, 사람이 살려면 소리를 잘 들어야지. 새끼발가락아 너는 아무 것도 듣지 못하니 듣는 일에 쓸모없는 넌 필요 없어!” 이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손이 있다가 “사람은 손이 있어야 줍고, 잡고, 가리키고, 먹지. 너 코는 삐죽 나와서 면적만 차지하고, 넌 무슨 필요가 있어? 없어져!”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요? 이것들이 다 어디에 붙어 있는 거예요? 몸에요. 이 손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 이것은 손이 아니에요. 손의 일을 할 수 없어요. 이 손은 몸에 붙어 있는 동안만 손일 수 있고, 그동안만 손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손의 의미와 근거는 몸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은사가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각 지체가 몸에 붙어있어서 그 역할이 있고 몸의 한 지체로 인정을 받듯이,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붙어 있어서 그 몸의 어떤 부분인가를 차지하고 어떤 역할인가를 한다는 것입니다. 귀와 엄지발가락의 차이는 붙어 있는 자리와 역할이 다를 뿐이지 똑같이 몸에 붙어있습니다. 그리고 전체로서는 몸의 일을 각각 다른 위치에서 다른 역할로 하는 것입니다. 귀와 엄지발가락은 누가 더 가치가 있는가, 누가 더 존귀한가를 가지고 차별화 하거나 서로 싸울 수 없습니다. 아무리 큰 역할을 할지라도 그것이 몸과 관계없이 떨어져 있는 것이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것일 지라도 그것이 몸에 붙어 있을 때에는 몸입니다. 그리고 몸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은사는 서로 몸을 구성해서 자기의 역할을 함으로 다 가치가 있고, 다 귀한 것입니다. 은사 상호간에 우열의 관계나 크고 작은 것, 높고 낮은 것, 귀하고 천한 것의 차이는 없습니다. 어떤 은사는 더 가치가 있고, 어떤 은사는 아무 것도 아니고 하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은사와 은사들 사이에는 ‘우열이나, 더 높거나 낮거나, 더 귀하거나 천하거나, 더 크거나 작거나’ 이런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요? 다 한 몸에 붙어 있으니까요. 각각 몸의 지체로서 고유한 역할을 하여 몸의 기능을 완전하게 하니까요. 모든 은사가 모두 중요합니다. 물론 은사는 한 목적을 위하여, 한 성령님이 주신다는 점에서도 통일성이 있습니다. 은사는 각각 다르지만, 그 은사를 각각에게 주신 분은 한 성령님이십니다.

4. 은사의 기원 : 성령님

은사는 어디로부터 오는가를 분명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은사의 기원이 어디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사는 자기가 열심히 노력하고 구하여 획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갖고 싶은 은사를 선택해서 그것을 갖기 위하여 공을 들이기도 하고 열심을 내기도 합니다. 은사의 기원을 확인하기 위해서 고린도전서 12장8절에서 11절을 보겠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은사를 이야기하면서, 계속해서 성령님, 성령님, 성령님이 은사를 주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8~11).

은사가 어떻게 해서 오게 되었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성령으로”, “같은 성령”, “한 성령”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능력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예언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영분별을, 다른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각종 방언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방언 통역을” 다 성령님이 주신다고 말합니다. 은사는 내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으로 이렇게 밝힙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

성령님이 이 은사를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은사의 기원은 성령님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은사를 나누어주는 원리는 무엇입니까? “그의 뜻대로” 입니다. 내가 무슨 은사를 가졌는가 혹은 내가 무슨 은사를 갖지 못했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은사를 갖지 않은 것 때문에 주눅이 들거나 부끄러워하거나 죄책감을 갖거나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어떤 은사를 갖지 못한 것은 성령님이 주시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성령님이 나에게 그 은사를 주시지 않은 것은 그것이 그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내게 그것은 필요 없다는 것이 성령님의 뜻이어서 주시지 않은 것뿐입니다.
저는 방언을 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겁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에도 그랬고, 부목사 때에도 그랬고, 방언을 하면 기분이 어떤지 느껴보려고 방언의 은사를 달라고 기도해 봤어요. 그런데 그 기도는 영영 응답을 안 하시더라고요. 그러면 저는 ‘아, 다른 사람은 방언하는데, 나는 왜 못하지? 나는 믿음이 적은 가봐. 와, 부럽다. 난 아직 신앙 수준이 멀었나봐.’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방언 못하는 게 내 책임이 아니니까요. 성령님은 왜 나에게 방언의 은사를 안 주실까요? 성령님이 보실 때 내게는 방언의 은사가 필요 없으니까요. ‘아, 방언의 은사를 주시지 않는 것을 보니 내게는 그것이 필요 없는가 보구나!’ 그리고는 잊고 살았습니다. 방언을 하는 사람을 보면 기가 죽을 일도, 그것을 부러워할 필요도, 그 사람들을 시기하고 미워할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성령님께서 저에게는 말씀을 깨닫는 은사,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왜 저에게 그걸 주셨을까요? 성령님이 저를 보실 때 나에게는 그 은사가 필요하니까요. 여러분에게 어떤 은사가 없는 것은 그것이 필요 없기 때문이고, 어떤 은사가 있는 것은 여러분에게 그 은사가 필요하니까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그 은사가 필요한 것은 그것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루어야 할 목적이 있어서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는 똑같이 중요하고 가치 있고 귀합니다. 은사의 차이는 신앙 수준의 차이가 아닙니다. 은사는 그 사람의 신앙수준의 척도가 아닙니다. 상급의 차이도 아닙니다. 가치의 차이도 아니고, 우열의 차이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받은 은사를 가지고 자랑할 것도 없고, 자기에게 특정의 은사가 없다하여 기죽을 것도 없습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은사는 성령님이 보실 때 우리에게 필요해서 주셨고, 필요하지 않아서 주시지 않았다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말은 은사는 영구적인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필요해서 주셨고 필요하지 않으면 다시 가져가실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 방에 불이 켜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글도 읽고, 제가 여러분을 볼 수도 있고, 여러분도 저를 볼 수 있어요. 그런데 갑자기 전기가 나가서 불이 다 꺼져 버렸어요. 그럼 어떻게 하죠? 손전등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손전등이나 촛불을 나누어 드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오백 명이 앉아 있는데, 오백 명 전체에게 손전등을 나누어 드릴까요, 아니면 띄엄띄엄 몇 사람에게만 나누어드릴까요? 띄엄띄엄 주지 않겠어요? 이 교회가 가난해서가 아니라, 다 줄 필요가 없으니까요. 띄엄띄엄 몇 사람만 등불을 가지고 있어도 밝힐 수 있으니까요. 손전등을 받은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오백 명 모두가 잘 볼 수 있게 해야지요. 그것이 캄캄하게 전기가 나간 이 홀에서 손전등을 받은 사람의 역할입니다.
은사란 모두에게 똑같은 것을 다 줄 필요가 없는 것이에요. 그게 은사입니다. 몇 사람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다른 사람이 덕을 보게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불이 들어왔어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이 손전등을 다 끄지요.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손전등을 걷어가 버리지요. 왜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으니까요. 은사가 그런 것입니다. 은사는 성령님의 뜻대로 필요에 따라 유익을 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사는 한번 받으면 영구적인 소유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캄캄할 때 손전등을 비추어서 오백 명이 덕을 보게 하는 일을 했는데, 불이 들어왔다고 그것을 끄고 존재감 없이 앉아있으려니 아깝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손전등을 받았다는 사실, 내가 이 손전등으로 당신들을 비췄다는 것을 계속 주장하고 싶어지지요. 그리고 아직도 자기는 그 손전등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 자기 존재를 확인시키고 인정받으려 하지요. 한국에 병 고치는 은사를 받아서 많은 사람들을 치유해주고, 본인도 아주 유명해져서 부자가 된 사람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여러 사람들이 말년이 비참하게 끝나버리곤 했습니다. 더 이상 그 은사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도 여전히 자기는 치유의 특별한 은사를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끝까지 고집을 부리다가 비참한 말년을 맞게 된 것이지요. 이것이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게 위험한 점입니다.

5. 은사의 목적 : 유익

이제 생각할 것은 은사는 왜 주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즉 은사의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에베소서 4:12).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가장 중요한 목적은 분명합니다. “유익하게 하려”함입니다. 이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내가 어떤 은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유익하게 하려고” 입니다. 자기를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교회를 유익하게 하라고 은사를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고 은사를 주셨습니다. 은사를 주신 목적 가운데 어디에도 그 은사로 자기의 잇속을 챙기거나, 자기가 유명해지거나, 자기가 영광을 누리게 하려고 주셨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은사를 제대로 쓰고 있는가, 아닌가를 확인해 보려면 그 은사를 활용함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면 됩니다. 내가 은사 받았다고 나서니까 교회에 분열이 일어나서 패가 갈리고 있다면 은사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내가 은사를 받아서 사용하니까 내 주위의 교인 가운데 유익을 얻는 사람이 있다면, 은사를 바르게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은사를 사용할 때 교회가 유익을 얻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가? 이것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은사에는 우열이 없고, 귀하고 천한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4장을 보면 마치 은사에 더 귀한 것과 덜 귀한 것, 더 나은 것과 더 못한 것이 있는 것처럼 말씀합니다. 방언과 예언을 가지고 하는 말씀입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전 14:1-5).

언뜻 보면 예언의 은사가 방언의 은사보다 낫고, 방언의 은사는 예언의 은사보다 급이 떨어진다는 식으로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은사 가운데는 나은 것이 있고, 못한 것이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방언이 자기 자신을 유익하게 하고 예언이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차라리 예언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은사 자체의 우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사로 무엇을 이루어내는가를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언의 은사는 권면하고 위로하여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고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방언은 자기와 하나님 사이에 신비한 말을 하는 것이므로, 잘못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덕을 세우지 못할 위험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교인이 방언을 함으로써 자기 자신만 드러나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과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는데, 어떤 교인은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권면하여 교회에 덕을 세운다면, 방언하는 자는 예언하는 자만 못한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은사 자체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은사를 가진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결국 은사의 목적대로 다른 사람과 교회의 유익과 덕을 세우는 방식으로 은사를 활용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의 유익과 자랑을 위하여 은사를 이용하는 사람인가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꼭 방언과 예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은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봉사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고, 상담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봉사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그것으로 여러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교회에 덕을 세웁니다. 그런데 상담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계속해서 자기만 드러내고 자기 잇속만 챙겨서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한다고 합시다. 성령님이 주신 은사 자체는 똑같이 귀한 것이지만, 그 은사로서 이루어내는 결과에서는 다른 것입니다. 상담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은사의 목적을 이루지 않고 자기 자신의 것을 채웠으므로 봉사의 은사를 가진 사람만 못합니다.
결국 무슨 은사가 더 중요하냐는 논쟁이 아니고, 은사를 활용하는 데 있어서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중요하다고요? ‘덕을 세워야 한다.’ ‘유익을 끼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은사를 가지고 교회생활에서 어떤 결과가 나타났는가? 다른 사람들이 유익을 얻고 있는가? 교회가 세워져 가는데 도움이 되는가?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가? 이러한 관점에서 계속 점검을 해보아야 합니다.
은사를 받았다고 나서서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한 사람들이 우리 역사에 여러 명이 있어 왔습니다. 현 아무개도 있고, 김 아무개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얼마나 귀한 일을 많이 했는지요? 정말 상처받아 마음이 아픈 사람들, 육신이 병든 사람들을 위해 간절하게 기도하며 돌보아서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가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두 가지 문제입니다. 하나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더 이상 그 은사가 자기에게 없는데도 영구적으로 그 은사를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행사하다보니, 거짓을 행하고 사기를 치게 된 것입니다. 은사는 영구적인 소유물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둘째는 그 은사를 행하여 유명해지자 마치 자기가 하나님처럼 처신을 하고, 또 자기의 경제적인 잇속을 챙기는 데로 가버린 것입니다. 은사를 자기의 존재와 체면, 자기의 명성과 이익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써먹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위험한 지경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은사는 왜 주시나요? 필요가 있고 이루어야 할 목적이 있어서 주시는 것입니다. 은사는 언제나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고,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목적으로 활용해야 하는지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은사는 보석 상자에 잘 넣어서 보관해 놓아야 할 다이아몬드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은사는 소장품이 아니라고요. 또 은사는 갖고 다니면서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드러내는 장식용으로 주신 것도 아닙니다. 은사는 이걸 가지고 누군가를 섬기고 그리스도를 나타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어디에선가 누군가를 유익하게 하는 자로 살도록 성령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6. 은사의 확인

은사는 어떻게 확인합니까?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은사를 확인하는 방법을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확인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여러 잘못된 일들을 해온 것을 비판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여기저기에 ‘은사 개발원’ 이란 게 있기도 했고, ‘은사 확인반’ 이라는 것이 있기도 했습니다. 내가 무슨 은사를 가졌는지 확인시켜주고, 또 은사를 개발해 준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은사는 누가 확인시켜주거나, 또 누가 도매상처럼 하나님께 은사를 왕창 떼어다가 그 다음에 사람 모아서 나누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는 성령님이 그의 뜻대로 주신다고 이미 확인했습니다. 이것이 가장 기본입니다.
제가 목회할 때 만난 전도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방학을 하면 가족들과 잘 쉬다 오라고 여름휴가를 주는데, 매번 가족들을 두고 어디를 자꾸 갔다 옵니다. 나중에 보니 엉뚱한 데를 다닌 거예요. 한번은 휴가비를 챙겨주면서 이번에는 절대로 혼자 기도원에 가지 말고, 가족들과 같이 놀고 쉬고 오라고 보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부인이 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를 데리고 어느 수련원을 갔다는 겁니다. 그 부인이 씩씩거리면서 저에게 남편 이야기를 해요. “신학교 문 앞에도 안 가본 내가 첫 날 첫 강의를 들어봐도 이건 아닌데, 억울해요. 남편 신학대학원 공부시키느라 빚만 천만 원을 졌는데, 알고 보니 그런 데를 다녔어요” 하면서 어이없고 억울하대요. 강사 목사님이 목회를 잘할 수 있는 특별은사를 전수해 준다고 하더래요. 자기는 그 은사를 배우느라 미국 가서 오천만 원이 들었는데, 여기 온 사람들은 자기가 공짜로 전수를 해 준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은사는 영력이 뛰어난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가서 오천만원 내고 도매로 떼어다가 다른 사람들 모아서 백만 원씩 받고 소매로 파는 그런 게 아니에요. 은사는 없던 은사를 개발해서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성령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워 가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려고, 다른 지체들이 유익을 얻게 하려고, 우리가 신자답게 살게 하려고, 우리에게 필요해서 그의 뜻에 따라 성령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은사를 주신 성령님의 뜻에 따라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애쓰며 살아가는 가운데 그 은사의 효력과 능력이 강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 내가 갖고 싶다고 개발하거나 전수받아서 그 은사를 소유하게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은사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성령님께서 “내가 너에게 은사를 주노니” 하고 주시지 않아요. 환상으로 확인하거나, 꿈으로 확인하거나, 누구의 기도를 받아보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한 사람에게 한 가지 은사만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한 사람에게 여러 은사를 주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교회생활을 하면서 대략 세 가지 방식으로 자기의 은사를 확인하게 됩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의 상태를 관찰하면서 어떤 은사가 자기에게 주어졌는지 확인 하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는 내가 교회를 생각할 때나 특별한 상황에 처한 어떤 사람을 생각할 때, 유난히 어떤 일을 해보고 싶거나 어떤 특별한 일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무관심하게 지나치는데 나는 자꾸 그 사람이 잊히지 않고 뭔가를 해야 할 거 같은 특별한 마음이 생깁니다. 교회가 행하는 어떤 일을 놓고 어떻게 하면 그 일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이 강하게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별히 어떤 봉사를 할 때면 내 마음이 편안하기도 하고 혹은 내가 어떤 일을 하면 열매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혹은 무엇을 생각할 때 내 마음에 기쁨이 있는가? 내가 어떤 일을 하면 주위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결과가 나타나는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자신을 관찰하면서 그 일들을 자꾸 해 봐야 합니다. 자꾸 생각나고 책임감이 생기고, 그 일을 내가 자꾸 해 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일이 무엇인가를 살펴서, 그것이 성령님이 내게 주신 은사가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해보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어떤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성령님이 주신 은사일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내가 부담 없이 쉽고 편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이 언제나 내가 받은 은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그 일을 하려면 잠도 못 자고 괴롭고, 짜증도 나고 힘이 들지만 중단할 수 없고, 그래도 그 일을 하면 마음에 왠지 보람이 있고, 편안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괴롭지만 다른 이들과 교회의 유익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그 짐을 걸머지는 것이 맞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고, 성령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 강조하는 말은, 은사의 목록을 쭉 펴 놓고, ‘나 이거 좋아!’, ‘이건 아니야!’하면서 무슨 적성검사 하듯이 그렇게 단번에 은사가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나를 잘 아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관심을 갖고 살펴봄으로써 나의 은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내가 가지고 있는 은사를 증거 해주거나 확인시켜 주기도 합니다. “나는 집사님만 만나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져요. 내가 집사님 만나기 전에는 맘이 어수선하고 혼동되고 두근거리고 그랬는데, 집사님 만나서 털어놓고 또 집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당장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닌데 왠지 마음이 후련해지고 용기가 생겨요.” 그런 소리를 들으면 어려운 일을 만나서 속이 복잡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 주는 데 내 은사가 있는가보다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의 은사를 다른 사람들의 반응으로부터 짐작을 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그 일을 해보고 힘을 써보는 거예요. 은사는 소장품이나 장식품이 아니라고 그랬잖아요? 은사를 주신 것은 그것이 필요한 상황이 있고, 그것으로 이루어야 할 목적이 있어서 주시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자꾸 해 보는 거에요. 그래서 자기가 기쁨을 얻고 다른 사람도 유익을 얻는 것을 확인하며 찾아가는 것이지요. 은사를 확인해서 그 은사에 맞게 자기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의 지도를 받아 어떤 사역들에 헌신을 하면서 은사를 확인하기도 합니다. 제 경험으로는 담임 목회자를 비롯한 교역자들이나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인들을 여러 방면에서 관찰하고 살피는 과정에서 “당신은 이런 쪽에 은사가 있는 것 같으니 한번 이것을 해 보지 않겠느냐?” 하고 권면을 하게 됩니다. 목회자가 자기 욕심이나 아니면 교인들을 한번 써 먹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을 겪어보면서 영적인 안목과 분별 그리고 그 분에 대한 애정을 갖고 이런 저런 사역을 만들어서 권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순종해서 그대로 해 보는 것이 자신의 은사를 확인하는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도 목회할 때 교회생활을 힘들어하거나, 혹은 무엇인가 봉사는 하고 싶은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방황하는 교인들을 자주 보았습니다. 혹은 맡은 사역이 너무 힘들거나 열매가 없어서 결국 지쳐서 넘어지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잘 살펴보면서 기쁨으로 할 수 있겠다 싶은 이런 저런 일들을 번갈아가면서 맡겨보기도 했지요. 그러면 어느 경우에 자기가 기쁘게 감당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쁨과 유익을 주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본인들도 그 일을 할 때 기쁠 뿐만 아니라 보람도 느낀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에 너무 굴곡이 심하고 힘들어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가르치는 일에 탁월한 소질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맡아서 가르치는 일을 만들어서 권했습니다. 자기는 그런 일에 전혀 관심도 없고, 소질도 없다며 힘들어했습니다. 일 년 지나고 나서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앞으로는 목사님이 하라고 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기로 작정을 했어요. 어떻게 그렇게 저를 정확하게 아셨어요? 그 일이 저에게 딱 맞는 일이더라고요. 너무 행복했습니다.” 처음에는 목회자가 부탁하니 관심도 없고, 소질도 없고, 재미도 없지만 어쩔 수 없이 했는데, 그 일을 하면서 자기에게 기쁨이 있고, 효과도 있고, 너무 좋았답니다. 목회자들이 진실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상태를 보고 사역을 권하면, 그때는 영적인 지도자를 신뢰하고 그 일을 해보는 것이 은사를 확인하는 한 과정일 수 있습니다.

7. 은사를 받은 신자의 생활원리

지금까지 드린 말씀들은 사실 은사를 받은 신자의 생활 원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몇 가지로 요약 하겠습니다.

(1) 은사의 목적 성취를 위하여

이미 강조하였듯이 은사의 목적을 성취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은사를 가진 자의 영광이나, 자기 자신의 어떤 잇속이나,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일에 집중하게 되면, 은사를 받은 신자의 삶에서 반드시 실패하고 맙니다. 은사를 주신 목적은 분명합니다. 다른 사람과 몸 된 교회에 유익이 나타나는가, 하나님의 영광이 실현되고 있는가에 집중해야 합니다.

(2) 선한 청지기처럼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0~11).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은사는 계급도 아니고, 특별히 잘나서 받은 상급도 아닙니다. 내가 해야 될 일을 할 수 있도록 주신 자료라고 생각하고 선한 청지기의 자세로 해야 합니다.
달란트 비유를 잘 아실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받은 종들의 이야기 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몇 달란트를 받았냐하는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몇 달란트를 받았는가는 그 사람의 능력이나 등급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주인이 그냥 ‘너는 이거 가져, 너는 이거 가져.’하고 나눠준 것일 뿐입니다. 그야말로 은사지요. 그게 달란트에요. 종들이 어떻게 했는지 나중에 주인이 확인을 합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두 달란트를 남겼고,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이 두 사람은 주인에게 받은 것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이 두 종에게 하는 칭찬이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걸 가지고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주인에게 받은 것을 땅에 묻어놓고 있다가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핑계는 분명합니다. ‘그 돈을 잃어버릴까봐, 괜히 나대다가 주인의 재산을 축내어 손해를 끼칠까봐, 본전을 까먹을까봐.’ 그래서 주인이 맡긴 것을 잘 보관했다가 그대로 갖고 왔습니다. 이 사람을 놓고 주인이 노발대발 하며 책망을 합니다. 아니 저주를 합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그에게서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주인은 그를 가리켜 악하다고 단정을 합니다.
이 사람은 왜 악한 것일까요? 손해를 보건 이익을 보건 주인이 준 그걸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은사를 받아서 그것을 보석 상자에 넣어두고 보관해 두거나, 그것을 소장용으로 만들어 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다음 자기가 그렇게 한 책임을 주인에게 돌린 거에요. 내가 이걸 까먹으면 당신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엄격한 분이기 때문에 본전을 안 까먹기 위해서 이렇게 했다고 구차한 변명을 갖다 붙인 것이지요.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는 엄청난 칭찬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돈을 남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만약 그 두 사람이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다가 본전을 다 까먹었어도 주인은 그들을 그렇게 칭찬했을 것입니다. 돈을 남겼다는 사실이 아니라, 열심히 일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을 칭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다”는 주인의 말은 그들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알고 그 일을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인의 입장에서 적은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남긴 것은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적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종들에게도 적은 일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 두 종은 그것이 자기들의 인생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일로 알고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주인은 그것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은사를 받은 사람은 선한 청지기의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나한테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그가 위로도 받고, 내가 말하면 다른 사람보다 설득력 있게 말을 잘 할 수 있는 은사가 있는 게 분명한데, 괜히 나섰다가 상처받고, 시간 손해보고. 내가 뭐 그럴 거 없지. 그거 했다고 내가 무슨 월급 받아?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지.’ 한 달란트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섯 달란트 받고 열심히 일하다가 다섯 달란트 다 까먹을 위험이 있을지라도 그걸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할 뿐입니다. 은사를 가지고 교회 일을 하다 보면 나 때문에 은혜를 받고 유익을 보았다고 고마운 말을 해주는 사람도 생기지만, 계속 억울한 소리만 듣고 상처만 받고 손해만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선한 청지기로 주인의 이름으로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드러나도록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우리가 받은 은사를 활용하며 사역을 할 때 따라야 할 세 번째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드러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공으로, 나 자신의 능력으로, 내가 하는 것처럼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하는 것으로, 그래서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하나님이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은사를 받아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일수록 자칫하면 ‘내가 사람 만나고 나면 바뀌지, 내가 찾아가면 일이 해결되지.’ 하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온데 간 데 없고, 언제나 나의 공으로 하는 것처럼, 내 실력으로 하는 것처럼, 내 능력으로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4) 사역 자체에 집중하여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6~8).

한 마디로 요약하면 “너에게 주어진 일 그 자체로 기쁨을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해서 뭐가 생기는데? 이렇게 해서 성공할까? 다른 사람은 뭐하는데? 다른 집사가 나보다 더 중요한 일 하는 거 아니야? 어떤 일이 더 중요한데? 이렇게 일하면 사람들이 좋아할까? 이렇게 일해서 손해 보는 거 아니야? 이렇게 일하면 내가 어느 정도나 기여할까?’ 이러한 공헌도나 성취도 같은 이런 것에 얽매여서 불안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내게 주신 은사로 사람을 돌보고 있다.’ ‘나는 지금 내게 주신 은사로 말씀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하며, 은사를 활용해서 살고 있는 삶과 사역 그 자체를 기쁨과 보람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사역 그 자체를 즐거워하라는 말씀입니다.

(5) 사랑의 원리로

고린도전서 12장 마지막 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전 12:31).

그리고 이어지는 것이 사랑장입니다.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말한 여러 은사 중에 사랑이라는 은사가 하나 있다. 그 은사가 가장 크다.’ 이렇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 은사가 무슨 은사가 되었든지, 그 은사를 활용하고, 그 은사를 따라 사는데 있어서, 반드시 공통적인 원리로 삼아야 될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게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은사든지 그 은사를 활용해서 사역을 하려고 할 때, 반드시 따라야 할 원리가 있는데 그게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많은 은사 가운데 더 뛰어난 은사가 아니고, 모든 은사들이 반드시 가져야 될 공통적인 기반이고, 원리이고, 근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가장 큰 은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은사든지 그것을 행할 때는 반드시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사랑은 은사의 한 종류가 아닙니다. 사랑은 모든 은사를 실천하는 근본 원리입니다. 사랑은 은사를 드디어 은사답게 하고, 은사를 가치 있게 하고, 은사를 빛나게 합니다.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일, 그리스도가 나타나게 하는 일은 사실 사랑의 마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은사를 행할 때는 사랑으로 하라!” 은사를 활용해서 무슨 일을 할 때는 언제든지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읽어보세요. 사랑을 추상적인 개념이나 아이디어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초지일관 사랑을 눈에 보이는 구체적이고 의지적인 어떤 행동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인가, 사랑은 무엇을 행하는 것인가? 이것이 고린도전서 13장이 사랑을 말하는 기본 패턴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너무 추상적으로, 개념적으로, 이론적으로만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의지적인 행동이 아니라, 느낌과 감정적인 무엇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고, 의지적으로 행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8. 이 모든 사실이 주는 교훈

마지막으로 이 모든 사실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은사는 우리에게 족쇄로 준 것이 아니라 은혜로 준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은사는 우리에게 복입니다. 은사는 신자에게만 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귀찮거나 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은사에는 등급이 있는 게 아닙니다. 우열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은사는 그 사람의 신앙수준의 척도가 되지 않습니다. 은사는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는 일에 우리가 쓰임 받는 놀라운 수단입니다.
그러나 은사는 그것을 활용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서는 위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내 공으로, 내 잇속을 위하여, 내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은사를 써먹으려는 유혹에 우리는 언제나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은사를 따라 사는 현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가, 나에게 은사를 주신 목적이 수행되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살피면서 은사 받은 신자로, 직분자로, 은사를 가진 사역을 행하게 되면 우리 모두에게 놀라운 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같은 인간들을 어디엔가 필요가 있고, 쓸모가 있다고 인정하셔서, 그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은사들을 선물로 우리에게 주셨으니 참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가 각각 지체가 되어 은사를 따라 그 역할을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즐거움으로, 평안함으로, 자원함으로 잘 감당하여, 서로가 서로를 유익하게 하고, 복되게 하며, 이 몸 된 교회를 잘 세워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그 속에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나타나는 복을 우리가 누리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사랑하셔서 성령에 대한 가르침을 집중적으로 듣고 배우게 하셨사오니, 이제 그 말씀들이 평생 살아가는 동안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이 길목, 저 길목에서 생각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하며, 바르게 하며, 복되게 이끌어 가는 중요한 안내자요, 지침이요, 관리자의 역할을 하는 말씀들이 되게 하옵소서. 감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정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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