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학 강의

효과적인 내러티브 본문설교를 위한 『N기법』 3/3

지난 연재 글에서 내러티브 설교를 위한 N 기법을 살펴보았다. 이제 N 기법을 통해 어떻게 내러티브 설교를 작성하는지 실례를 살펴보자. 명료한 설교작성의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먼저 각 움직임을 타이틀 형식으로 표시하고 그 움직임에 대한 특징도 간략히 기록해두었다. 그 이후 이에 따라 설교의 내용이 제시된다.

< N 기법에 따른 내러티브 설교의 예 >

제목 : 다시 웃다
본문 : 창 18:1-15

M1: 본문의 사건을 전개하라.
→ 아브라함과 사라의 삶의 배경을 천천히 제시하며 자연스럽게 설교를 전개함

아브라함이 뜨거운 한낮에 장막 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순간 눈을 들어보니 범상치 않은 세 사람이 자신의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놀랍게도 천사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즉시 달려가 그들을 영접했습니다(2절). 아브라함은 그들을 위해 정성스럽게 음식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무 밑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 옆에 함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6-8절)

M2: 본문의 위기를 보여주라.
→ 사라의 표면적 문제와 실제 문제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그로 인한 위기감을 심화함

식사를 마친 천사들은 1년 후에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24년 동안 기다렸던 아들의 출생 소식이었습니다. 사라는 이 놀라운 소식을 천사들과 아브라함의 뒤, 즉 장막 문에서 듣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10절). 그런데 문제는 사라가 이 축복의 소식을 차가운 웃음으로 반응한 것입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12절).
여러분, 이런 사라의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라를 단순히 쉽게 비난하지 마십시오. 사라가 냉소적인 차가운 웃음을 지었던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사라는 너무 오랜 기다림에 마음이 지쳐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편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믿고, 무려 24년 동안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사라의 현재 몸 상태가 이 약속을 이룰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75세에 하란을 떠난 아브라함은 현재 99세입니다. 사라는 아브라함보다 열 살 적은 89세입니다(17:1, 17). 더구나 사라는 출산할 수 있다는 신체적 표시인 생리가 이미 끊긴 상태였습니다. 여인으로서 출산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라는 자신을 ‘노쇠했다’라고 표현했습니다(12절). 이 단어의 히브리어 원문의 문자적 의미는 ‘낡았다. 너덜너덜하게 해어졌다’입니다. 낡아서 해어 빠진 몸을 가진 사라, 출산할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뿐입니까? 사라의 마음에 깊이 남아있는 상처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86세가 될 때까지 10여 년을 기다려도 도대체 임신이 안 됐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여종 하갈을 동침하도록 아브라함에게 주었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의 문화적 관습이었지만, 여인이자 아내로서 얼마나 마음이 상했을까요. 더구나 하갈이 임신하자 사라를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라는 당시의 상황을 자신이 멸시를 받았다고 표현했습니다(16:5). 시간이 지나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은 것입니다.
지난 24년 동안 마음은 지쳤고, 육체는 시들었으며, 상처는 깊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1년 후에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니요. 그럴 수 있을까요? 믿을 수 있을까요? 사라에게는 이상하게만 들렸습니다. 마치 강한 햇볕으로 뜨거워진 아스팔트 위에 말라빠진 씨를 뿌리고 싹이 자라는 것을 믿으라는 격이었습니다. 사라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웃었습니다. 대놓고 웃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자포자기의 웃음, 불신의 웃음을 지었던 것입니다. 지친 마음, 육체의 한계, 과거의 상처 때문이었습니다.
사라의 현재 처지를 보면 사라의 불신의 웃음이 이해가 됩니다.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라가 결정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사라의 진짜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지금 자신을 찾아오시고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사라는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라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15장, 17장을 보면 지금까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만 찾아오셔서 아들을 낳을 거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15:4, 17:19). 그렇기에 사라는 남편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이 약속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천사의 모습으로 사라에게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아내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는데, 천사는 이미 그녀의 이름이 ‘사라’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9절). 천사는 사라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름까지 알았던 천사가 그녀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었을까요. 아닙니다. 방문의 목적이 사라에게 약속을 주려는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여자라는 신분 때문에 사라가 장막 문에 서서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을 천사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아브라함과의 대화를 통해 말하고 있지만, 사라가 분명하게 들을 수 있도록 축복의 약속을 전해준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라는 자신을 직접 찾아오시고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한계인 지친 마음, 시든 육체, 과거의 상처에 갇혀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차가운 웃음을 지은 것입니다.

M3: 본문의 사건을 오늘날로 연관하라.
→ 본문의 사라처럼 우리도 약속을 받았지만 계속되는 기다림에 지칠 수 있음을 보여줌

생각해보면 본문의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소중한 약속을 받은 것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기다려야 합니다. 본문의 사라 같은 처지죠. 그렇게 한정 없는 기다림에 숨이 찰 때가 많습니다. 그때 솔직히 어떤 마음이 들던가요? 3년, 5년, 10년, 계속되는 기다림…. 우리는 경험적으로 압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너무 오래 기다리다 보면 지치고 맙니다. ‘희망 고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막연한 희망을 품고 계속 기다리다가, 더 깊은 절망에 빠지는 현상입니다. “나도 취업할 수 있어, 결혼할 수 있어, 내 집 마련할 수 있어, 언젠가 좋은 날이 오겠지….” 이렇게 믿고 계속 기다립니다. 그러다 어떤 순간 마음이 지치고, 결국 쓰디쓴 절망을 맛보게 됩니다. 어쩌면 사라가 이런 희망 고문을 받은 심정이 아니었을까요. 우리도 역시 기약 없는 기다림에 절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M4: 본문의 위기가 오늘날의 위기임을 느끼게 하라.
→ 본문의 사라처럼 우리도 찾아오시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비웃을 수 있음
연관 문장과 연관 예화를 통해 본문의 위기를 오늘 우리 삶의 위기로 연관시킴

저는 청소년기에 예수님을 믿고 목회자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신앙이 깊어지면서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성경 말씀으로 영혼을 깨우는 ‘말씀의 종’이 될 것이라는 꿈을 주셨습니다. 저는 그 꿈을 위해 한국에서 기본적인 신학 과정을 마치고 때가 되면 더 깊은 말씀 연구를 위해 유학을 가야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가정 경제가 점점 어려워지면서 유학은 꿈도 못 꿀 처지가 되었습니다. 유학은커녕 학비조차 내기 힘든 상황이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 학비를 벌기 위해 공항동에서 아버지와 함께 사과를 팔았습니다. 기말고사가 코앞에 닥쳤습니다. 그래서 사과를 팔면서도 틈틈이 책을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책을 보는 중에 한 아가씨가 사과를 사러 왔습니다. 아가씨는 제가 부른 값을 팍 깎더니, 사과까지 하나 덤으로 달라고 졸랐습니다. 저는 아가씨에게 사과 두 개를 더 주면서 말했습니다.

“아가씨, 사과 두 개 더 드릴게요. 그 대신 다음번엔 이렇게 길거리에 장사하는 분들에게 가격을 너무 깎지는 마세요.”

젊은 사과 장수 주제에 가르치려 드는 제 모습이 이상했던지 아가씨는 저를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제 한쪽 옆에 펼쳐져 있던 영어원서 책을 보았습니다.

“학생이세요?”
“네. 아버지도 돕고 학비도 벌려고 사과 팔고 있어요.”

그 아가씨는 안됐다는 눈으로 저를 쳐다보고는 산 사과를 가지고 말없이 갔습니다. 저는 다시 혼자 남았습니다. 제 머리 위로 비행기 날아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비행기 바닥이 다 보일 만큼 가깝게 날고 있었습니다. 그 날아가는 비행기 밑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젊은 제가 사과를 팔고 있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하나님 앞에 원망의 말을 쏟아냈습니다.

‘하나님 이게 뭐예요. 꿈이나 주시지 말지….’

순간 제 얼굴에 쓴 웃음이 스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본문의 사라처럼 저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며 냉소적으로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해 지금 그분 앞에서 쓴웃음을 짓고 계십니까?

M5: 본문의 구원자 하나님과 나타난 믿음의 반응을 보여주라.
→ 사라의 불신에도 찾아오시고 약속을 이루어 주신 하나님을 강조함
사라는 하나님 앞에 잘못된 믿음의 반응을 보임
그러나 하나님은 그녀를 진짜 웃음으로 다시 웃게 하심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은 천사의 모습으로 사라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에 휩싸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떨며 웃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라가 분명 웃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15절). 이렇게 하나님과 사라의 대면 이야기는 끝나고 맙니다. 너무 아쉽습니다. 부자연스럽습니다. 갑작스러운 마무리입니다. 본문에서 뭔가 냉랭함까지 느껴집니다. 이게 다 사라의 냉소적인 웃음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제 사라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렇게 사라의 자포자기, 불신의 웃음으로 시작된 한 해가 지났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1년 뒤 창세기 21장에서 신기하게도 사라는 다시 웃고 있습니다. 이번의 웃음은 18장의 싸늘한 웃음과는 다른 느낌을 줍니다. 놀랍게도 아이를 품에 안고 활짝 웃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21:1, 2).
사라의 웃음은 더는 차가운 웃음이 아니라 따뜻한 웃음입니다. 냉랭한 속웃음이 아니라 모두가 들을 수 있는 활짝 핀 웃음입니다. 혼자 쓸쓸히 웃는 웃음이 아니라 함께 웃는 웃음입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도 웃는다는 뜻으로 ‘이삭’이라고 지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21:3, 6).
사실 사라가 이렇게 환한 웃음, 큰 감동의 웃음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25년을 기다려서 얻은 아들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큰 기쁨의 이유는 약속을 이루어 주신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약속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21장 1절과 2절은 이 사실을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라가 웃고, 아브라함이 웃고, 듣는 자가 다 함께 웃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이 웃음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신 웃음입니다. 18장 12절에 나타난 사라의 첫 웃음은 사라가 스스로 웃은 것이었습니다. ‘사라가 웃었다.’ 그러나 21장 6절에 나타난 사라의 웃음은 하나님이 웃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만드셨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깨닫습니다. 진짜 기쁜 웃음은, 내가 스스로 웃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축복의 웃음은,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서 만드시는 웃음입니다.

M6: 동일한 구원자 하나님과 필요한 믿음의 반응을 제시하라.
→ 동일한 하나님 앞에서 사라의 불신의 웃음이 아니라 믿음으로 반응함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음. 그 약속을 붙잡고 신실하게 살아감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지치고, 육체는 시들고, 상처만 남아 냉소적 웃음을 지었던 사라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주시고 그것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라가 진짜 웃음을 지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사라를 찾아오셨던 그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도 찾아오십니다.
뒤돌아보면 제가 쓴웃음을 지으며 사과를 팔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힘들지. 내가 다 안다. 그러나 네가 말씀으로 영혼을 깨우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현실을 이기는 훈련을 네가 먼저 받아야 한다. 아들아, 힘들지. 그러나 견뎌라.’

그날 차가웠던 현실의 자리에 하나님께서 따뜻하게 저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약속해주셨습니다. 저는 쓴웃음을 거두고 눈물을 흘리며 제 중심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힘들지 않습니다. 견딜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이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나님께서 제 고백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상황은 여전히 쉽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갈 때 그분께서 크고 작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꼭 필요한 공부를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셨고, 말씀으로 영혼을 깨우는 자리에 저를 세워주셨습니다.
여러분, 사라를 찾아오셨던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무엇을 약속하시는지 들어보십시오. 그 약속을 냉소적 웃음이 아니라 뜨거운 믿음으로 붙잡으십시오. 그리고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믿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십시오. 어느 순간 하나님이 만들어 내는 환한 웃음이 우리의 얼굴에도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권 호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