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탐구와 설교 작성

수난일 설교를 위한 본문탐구와 설교 실제

* 수난일은 고난 주간의 금요일을 말한다. 많은 교회들이 수난 일 저녁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찬식을 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금년 수난일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교회에 모일 수가 없다. 그래도 이 날은 교회적으로 수난일 온라인 예배를 저녁 정한 시간에 드리면 많은 성도들에게는 다른 때와는 다른 의미와 감동을 경험하는 특별한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가능하면 성도들 가운데 믿음으로 고난을 통과했거나 아직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 혹은 구원의 체험을 한 사람들 가운데 한 두 사람이 예배 현장에 나와서 간증을 함께 나누면 모니터 앞에 둘러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에게 특별한 은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든지 이 날의 모임이 우울하고, 슬프고, 엄숙하기만 한 예수님 추모 예배처럼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성찬식을 갖고 싶으면 부교역자들이 있으면 교역자들이 그렇지 않으면 당회원들이 성찬식을 행하면서 실시간 중계예배로 드려도 좋을 것이다.

* 아래의 설교는 본문의 주해를 통한 새로운 의미의 선포라기보다는 이미 들어 알고 있는 내용을 다른 스타일로 전달해 보았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논리적이거나 신학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는 것을 피하고, 무능력한 모습으로 끝까지 고난을 당하고 죽는 예수님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을 택하였다.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무시하는 군인과 군중의 시각을 취하여 예수님을 바라본 것으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나 자신의 갈등(이것은 청중의 갈등 혹은 관심사이기도 하다는 확신 아래)과 그 갈등을 풀어나간 과정을 나 자신의 고백적 스타일을 도입하여 전개해 나가면서, 결국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와 효과가 무엇인지 드러나도록 해보려는 의도이다. 설교가 끝난 후 하나님의 아들로서 승리가 강조된 성찬예식을 거행하는 것도 절기의 특수성을 부각시키고 실감하게 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 절기설교를 염두에 두고 본문의 단락을 정하거나 본문의 각 절과 단락의 주해에 많은 할애를 하지 않고, 전체적인 장면을 파악하고 총괄적으로 언급하는 방식으로 본문을 취급하였다. 본문의 인물 배역을 정하여 낭독하게 하는 것도 지루함을 없애거나, 절기의 특별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이 설교는 코로나 19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거나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설교자의 의도에 따라 교회와 사회가 처한 현상황을 적용적 차원에서 연결시켜서 메시지를 선포하면 좋을 것이다.

본문 : 마태복음 27:26-53
제목 : “죽음을 죽인 죽음”

* 설교문

1. 고난의 현장·
오늘은 예수님의 수난일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고난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신 현장의 모습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아우성칩니다. 총독 빌라도는 여론에 굴복하여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줍니다. 현장에 모여 있던 로마 병정들, 군중들, 그리고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온갖 짓으로 예수님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끌고 갑니다. 군중 앞에서 옷을 벗겨버립니다. 가시로 왕관을 만들어 씌워놓고 조롱을 퍼붓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침을 뱉습니다. 쥐어주었던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칩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비웃으면서 빈정댑니다. 극악무도한 살인자나 강도를 죽이는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아 매달았습니다. 옷을 벗겨 제비 뽑아서 나누고 앉아서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자존심까지도 깔아뭉개는 온갖 희롱을 다 퍼붓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구경꾼들도 머리를 흔들면서 모욕을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대제사장들,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2. 예수님의 반응
그러나 예수님은 그 괴로움과 고통과 모욕을 말없이 다 견디고 계십니다. 진통제 역할을 하는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라고 입에 대줍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거절하시고 스스로 고통을 당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이고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고통을 아무렇지 않게 잘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철저하고 극심했는지 본문 46절에서는 십자가에 달린 채 절규처럼 말씀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의 비명소리요 신음소리입니다. 물론 자기의 마지막 순간을 하나님께 의탁한 신뢰의 고백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육신과 영혼이 당하는 고통의 극치에서 토해내는 예수님의 절규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다시 크게 소리를 지르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50절).

3. 갈등의 유발(끌어들이기)
여러분,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당하신 멸시, 천대와 고통, 그리고 죽음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아, 우리 주님이 나를 위하여 지금 이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고 있구나. 참 감사하다. 감격스럽다.” 그런 마음이 드십니까? 그래서 감격의 눈물이 나오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대단한 분들입니다. 아니면 언젠가 배운 교리 생각이 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것은 우리 죄를 위해서라더라’고 하면서 배운 대로 덤덤하게 이 장면이 받아들여지십니까?

저는 처음 얼마동안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시는 장면을 볼 때마다 너무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울화통이 치밀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예수님을 괴롭게 하고 마침내 죽게 하는 그 사람들에게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정말 화가 나고 울화가 치민 것은 그 사람들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그것이 정면으로 부정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아무 대책도 없이 마냥 십자가에 매달려 있습니다. 이 모양이 저는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로마 병정들이 입을 놀립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와서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차며 빈정댑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46년에 걸쳐 지은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친구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너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이 인간들이 예수님에게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퍼부어댄 말과 행위의 핵심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불신과 비웃음이었습니다. 멸망당할 죄인들이 감히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 입을 함부로 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가만히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너무 무능력한 모습으로 그것을 다 당해내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저는 화가 납니다. 울화통이 치밉니다. “예수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이따위 죄인들이 당신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이 얄미운 인간들에게 당신의 능력을 한번 나타내서야 되지 않겠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보란 듯이 한번 잠깐만 내려와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만 해주면 안 됩니까? 그래서 이 인간들이 꼼짝못하게 해주고 올라가셔서 죽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만 이 사람들이 원하는 방법대로 증명해주면 안 되겠습니까? 이것이 얼마나 좋은 전도의 기회입니까? 이 인간들이 예수님이 누군가를 모르고 감히 까불고 있잖아요!”

이것이 한동안 저의 고민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의 모습, 십자가에 달린 후의 예수님 모습,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보면서 저를 사로잡는 고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도 압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가 그분의 한 마디에 잠잠해졌던 것을 우리가 압니다. 거라사의 한 남자 속에 있던 군대 귀신이 그분이 걸어오는 것만 보고도 벌벌 떨다가 쫓겨났습니다. 38년 동안 병을 고치지 못했던 병자가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완치되어 그 자리에서 자리를 들고 일어나서 갔습니다. 죽어서 썩은 냄새가 나는 송장을 명하여 일으킨 분입니다. 오늘 이 일이 있기 불과 며칠 전의 일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까짓 나무 십자가에서 잠깐 내려오는 일쯤 이분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원하시면 지금 십자가 밑에 모여 주님을 조롱하고 겁없이 까불고 있는 이 무리들을 말씀 할 필요도 없이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서 사해바다에 몽땅 날려서 수장시켜버릴 수 있는 그런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친히 그럴 수 있는 분이라는 말씀을 잡히시기 직전에도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치니까 베드로를 나무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營)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그런데도 예수님은 자신을 놓고 겁 없이 까불고 있는 이 가소로운 무리들을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화가 나지 않겠어요? 저는 예수님의 이런 처사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4. 해결의 실마리
그래서 한동안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그런데 그렇게 고민하면서 읽고 또 읽고 기도하던 어느 날,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이 기가 막힌 말을 우리가 들은 것이 여기가 처음이 아니지 않습니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말을 이전에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지 않습니까? 힘없는 모습으로 원수에게 이러한 도전을 받는 이 기가 막힌 장면을 어디선가 본 것 같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은 예수님이 사역을 막 시작하실 때입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때 사탄의 시험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였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말도 똑같고 장면도 똑같은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시며,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조건적인 요구를 거부하였고, 그것으로 이 시험을 이겼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조건을 충족시켜줌으로써가 아니라 거부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고 사탄을 이기셨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4장 13절은 예수님께 패한 사탄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가 “얼마동안” 예수를 떠났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6장에 가면 이 사탄이 돌아와 또 다시 예수님을 시험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가면서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그러던?” 그러자 이 사람 저 사람이 대답을 합니다. “엘리야라고 하던데요, 세례 요한이라고 하던데요,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하던데요.” 예수님이 가만히 듣고 계시다가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한참 있다가 베드로가 “예,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네게 그것을 알게 한 이는 네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다.” 그리고는 이때부터 ‘비로소’라고 했습니다. 이때로부터 이 하나님의 아들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을 비로소 말씀하시는 겁니다. 주님이 “내가 죽는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얼른 하는 말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돌이키며 말씀하십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인데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님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죽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것을 보고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하신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다시 사탄과의 한 판 싸움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 동안 잠시 떠났던 이 사탄과의 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탄은 광야의 첫 시험에서 내걸었던 그 조건을 똑같이 던지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너를 구원하라.” 결국 예수님은 단순히 예수님을 조롱하고 침뱉고 고개를 흔들며 비웃고 빈정대는 이 유대인이나 로마 군사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말의 의미도 모른 채,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동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도 알지 못한 채 사탄의 도구 노릇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쏟아놓고 있는 말이나 우리가 행하고 있는 행위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5. 절정
십자가에서 당하는 고난의 의미가 여기에 미치자 저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사탄과 싸우고 계셨습니다. 사탄이 첫 번째 아담을 시험하여 넘어뜨린 이래 인간에게 임한 죽음과의 싸움이라는 것이 생생하게 확인되었습니다. 첫 번째 아담 때문에 이 세상에 들어온 죽음을 두 번째 아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이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말씀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그 싸움을 예수님이 지금 십자가 위에서 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더 이상 울화통을 터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주님이 십자가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깨닫게 되니까, 이제는 오히려 주님을 응원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주님, 절대로 내려오시면 안 됩니다. 저 무리들이 아무리 꼬이고 아무리 주님 성질을 건드려도 참아주세요.”

주님이 마침내 그 모든 것을 다 견디시고 거기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마귀가 세력을 잡고 있던 우리 인간의 죽음을 죽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 얻는 길을 이루어 놓으신 겁니다. 이것을 증명하듯 주님께서 죽으시는 순간 새 시대의 도래를 알리듯 성소 휘장이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죽었던 성도들의 몸이 일어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51-53절). 생명을 일으키는 죽음이었음을 현장에서 입증한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 순간은 사탄이 완패를 당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음은 죽음을 죽인 죽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한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가 되는 역사가 이제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두려워하며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던 자를 놓아주려 하심이라.”는 히브리서 기자의 말이 바로 이것이었입니다(히2:14-15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요 3:14)고 말씀하셨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광야에서 뱀으로 뱀의 문제를 해결하셨듯이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6. 대단원
그러나 사탄이 주님을 죽지 못하게 묶어둘 수 없었듯이, 죽음이 또한 주님을 죽음에 머물러 있도록 매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활이 이미 전제되어 있는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53절도 주님이 죽는 순간에 일어난 일을 말하면서 동시에 부활의 순간에 일어난 일을 자연스럽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주님의 죽음은 이미 부활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고난당하셨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주님이 죽으심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생각하면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고난당하신 고난주간에 초상집에 온 사람처럼 옷도 검은 정장을 입어야 하고, 웃어도 안 되고, 즐거운 낯빛을 해도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가장 크게 웃으면서 춤을 추어야 할 날은 주님이 죽은 날입니다. 왜입니까? 주님 편에서는 주님이 승리하신 날이요, 우리 편에서는 우리가 살아난 날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편으로 생각하면 끔찍하고 슬프고 심각하기도 합니다. 우리 죄의 참혹함을 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우리 주님을 이렇게 참혹한 모습을 죽게 하였는가? 내 죄란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참혹한 문제가 드디어 해결되었다. 우리 주님이 죽음을 해결하시고 이기셨다’고 생각하면 춤을 추고 싶단 말입니다. 더욱이 그 죽음은 죽은 채로 머물러 있을 수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요, 부활이 전제되어 있는 죽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루신 그 역사가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나 자신의 역사가 되었다는 이 사실을 생각하면 기쁨과 감격의 찬송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진리를 말하면서 그렇게 힘차게 불러댄 부활의 찬송이 이제 나의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능히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는 분이었음에도 끝까지 고난을 당하시고 그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주님을 저는 사랑합니다. “나 죽어 너 살라” 하여 죽으신 그 사랑 때문에 오늘도 저는 산 자가 되어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 사랑을 힘차게 고백하고 이 찬양을 함께 드리기 위하여 오늘 이곳에 모여 있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우리 가운데 임재 하여 계시는 주님의 은혜가 생생하게 실감되는 이 시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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