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학 강의

설교의 내러티브 본질

성경의 문학적 형식과 신학적 목적에 비추어본 설교의 내러티브 본질


정창균
 

1. 설교의 근거와 기준으로서의 성경 

성경은 구두 커뮤니케이션(oral communication)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기록이다. 즉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기록된 커뮤니케이션(written communication)이 성경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설교는 기록된 커뮤니케이션인 그 성경을 다시 이야기하는(retelling)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설교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기록인 성경을 다시 이야기함으로써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커뮤니케이션의 한 과정(ongoing communication process)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설교는 전적으로 성경을 그 근거로써 의존해야 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성경은 설교를 위한 가장 본질적인 자료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설교가 진정한 의미에서 설교인가를 판정 짓는 준거 기준이 되기도 한다. 설교에서 본문의 메시지가 드러나고, 본문이 설교 안에서 그 기능을 하는 한에 있어서만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서 들려질 수 있는 것이다 (Pieterse 1987:9). 설교의 신적 수행자이신 성령조차도 성경과 조화되지 않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일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유의하여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성경은 “성경적 설교”와 “비성경적 설교”, 더 정확히 말해서 “설교”와 “설교가 아닌 것”을 판단하는 결정적 기준이 된다. 

설교와 성경의 관계에 있어서 성경은 단순히 설교의 메시지나 내용면에서만이 아니라, 설교의 형식이나 스타일면에 있어서도 일차적인 자료와 기준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본문이 필연적으로 갖고 있는 “형식과 내용의 합일(textual union of form and content)” 혹은 “형식과 내용 사이의 불가분리의 관계(the inseparable relation of form and content)”를 인식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설교에서 본문의 문학적 형식이나 스타일(문체)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cf. Wilder 1971: xxii). 설교에 있어서는 본문이 무엇(what)을 말하는가 하는 것 뿐 만이 아니라, 본문은 그 무엇을 어떻게(how) 말하는가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무엇을 말하는가와 그것을 어떻게 말하는 가는 비록 서로 구별하여 살펴볼 수는 있지만, 이 둘을 분리시킬 수는 없다(Wilder 1971:2,4 ). 그러므로 본문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기 위해서는 본문이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하여 그러한 형식과 스타일을 동원하고 있는 의도가 우리의 설교에 어떤 식으로든 반영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즉, 설교는 본문의 내용을 전달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메시지가 효과적으로 커뮤니케이션 되도록 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사용된 본문의 형식도 어떤 식으로든지 반영하여 전달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정창균 2002:27). 젠센이 주장하듯이, 우리는 본문으로부터 메시지를 추출하여 우리가 정해놓은 설교문 속에 집어넣는 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우리는 성경 본문의 내용과 형식 모두에 충실한 설교를 구축하도록 신중하게 고려해야만 하는 것이다”(Jensen 1980:128). 그렇게함으로써 우리는 본문이 의도한 바와 같은 커뮤니케이션 효과를 우리 자신의 설교에서도 이루어낼 수 있게 될 것이다(Achtemeier 1980:46). 토마스 롱은 “성경 본문이 가지고 있는 문학형식(literary form)과 역동성(dynamics)은 본문과 설교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데에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고, 또한 되어야만 한다”는 아이디어를 근거로 하여 그의 책 “성서의 문학유형과 설교”에서 이 문제를 설득력 있게 다루고 있다(Long 1989:11). 그는 성경의 문학 형식과 그 역동성이 우리가 본문에서 설교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사라져버리는 현상에 주목하면서, 설교자들이 성경 본문의 문학형식과 그 역동성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말처럼, 문학 형식적 차원에서의 다양한 본문의 형식들은 단순히 장식품에 지나는 것이 아닌 것이다(:12). 그러므로 설교의 형태(shape), 진행(movement) 그리고 내용(content) 모두가 본문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Thulin1990:7f).

이런 점에서 볼 때, 19세기 이성주의에 그 기원을 두고 그동안의 설교 형식의 주류를 형성해 온 전통적인 삼대지 설교나(cf. Ellingsen 1990:18-19, Steimle 1980:171), 고전 수사학의 영향 아래 설교의 본질을 논쟁과 증명을 통한 논리적 설득을 위한 논설로 전제하여 설교문을 서론-본론-결론의 틀 속에서 구성해 온 종래의 설교들은, 설교가 내용만이 아니라 그 형식도 본문에 근거를 두어야한다는 점에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설교에서는 그 형식이 천편일률적으로 서로 비슷하게 되고, 본문이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말하든지 상관 없이 설교자가 이미 나름대로 정해 놓거나 혹은 익숙해있는 설교 형식에 본문에서 얻은 메시지를 담아서 설교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장르의 본문이 설교의 본문으로 취해진다 할찌라도 나오는 설교는 언제나 똑같은 형식의 설교가 되고, 결국 본문에서 그 메시지가 그러한 형식으로 전달되고 있는 역동성과 커뮤니케이션의 효과는 사라지고 마는 결과가 초래 되는 것이다(정창균 2002:28).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본문에 대한 불충실의 문제를 야기한다. 이러한 설교는 일부 학자들의 비판처럼 결국은, “본문의 문학적 형식을 유기하고, 성경의 세계보다는 성경적인 주제들”을 전달하는 설교가 되고 마는 것이다(Ellingsen 1990:18-19, Steimle 1980:171). 악트마이어는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탄식한다.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는 우리의 심금을 울릴 수 있도록 성경의 장르들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이야기를 설교하려 한다면 반드시 그 본문과 동일한 이야기 효과를 낼 수 있는 말과 형식을 취해 전해야 한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의 명제로 바꾸는가?”(Achtemeier 1980:46). 

그러나 성경본문의 문학형식을 분류하는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혹시 성경의 각 책들이나 각권에 대한 문학적 장르의 분류가 명확하게 이루져있다 할찌라도 설교의 본문으로서의 문학적 형식이나 스타일의 문제는 또 다른 영역의 문제로 남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설교는 성경 전체나 한 책이 아니라, 어느 특정한 단락을 본문으로 삼아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며, 사실 설교에 있어서 본문의 문학적 장르나 문체 혹은 스타일의 문제는 각각의 개별 본문을 상대로 파악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시편을 설교할 때 그 시 자체는 저주시의 장르에 속한다 할찌라도 설교자가 설교를 위한 본문의 단위를 어떻게 결정하는 가에 따라서 같은 시 안에서도 그 설교의 본문 자체는 오히려 감사시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설교는 성경 본문의 문학적 형식과 문체, 혹은 스타일을 어떤 식으로든지 반영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원리를 무시할 수는 없다. [preachers_spacer]

2. 하나의 이야기 통일체로서 성경 

전체로서의 성경은 어떤 식으로든지 통일성 있는 문학적 장르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있는가? 전체로서의 성경에서 우리는 문학적 장르라는 관점에서 어떤 통일성과 일관성을 부여할 수 있는 성경 전체를 압도하는 명백한 원리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는가? 만일 전체로서의 성경이 장르의 관점에서 본질상 어떤 통일성을 확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설교의 본질적 성격을 구축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설교는 근본적으로 성경을 다시 이야기 하는 것(retelling)이기 때문이다.

전체로서의 성경은 하나의 이야기 통일체(narrative unity)로서 간주될 수 있다. 이것은성경을 구성하고 있는 실제적인 문학 형식들과, 그리고 성경이 기록된 신학적 목적을 고찰해보면 더욱 분명해 진다. 본 논문에서는 성경 전반에 걸친 압도적인 문학 형식이 무엇인가라는 관점과, 성경의 신학적 목적과 그것의 표현 양식이 무엇인가라는 관점에 비추어 볼 때 성경이 갖고 있는 이야기 통일체로서의 성격을 고찰하고, 이러한 사실이 설교에 대하여 함축하고 있는 본질적 요소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1) 성경의 문학적 형식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성경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문학형식은 이야기체(narrative)라는 데에 의견을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성경에는 매우 다양한 문학형식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을 막론하고 여전히 내러티브가 압도적인 장르라는 것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스트룹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성경의 중심부에는 이야기 세트가 있고, 이들 이야기들이 뼈대가 되어 그들을 중심으로 성경전체가 구축되고 있다”(Stroup 1981:145). 실제로 여러 학자들이 성경의 통일성을 내러티브라는 말로 이해하고 있기도 하다(cf. Stroup 1981:79,136,145; Frei 1974:15-16; Lindbeck 1984:120-121; Frye 1983:xii-xiii). 뿐만 아니라, 성경을 구성하고 있는 비이야기체(non-narrative) 부분들에서도 분명한 내러티브 구조나 요소들이 발견되는 것도 사실이다. 롱의 말처럼, 이야기가 성경의 하부구조(narrative understructure)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며, 성경에서 이야기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 않은 부분들까지도 성경의 맥을 잇고 있는 주요하고 큰 이야기들과 매우 긴밀하고 중요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롱 1995:123-24). 물론 어떤 부분들은 좀 더 직접적으로, 그리고 다른 부분들은 덜 직적접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러나 모든 부분들이 어떤 형태로든지 최소한 내러티브 하부구조(narrative infrastructure)를 전제하고 있거나 혹은 함축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상인 것이다. 다른 말로하면, 비이야기체의 본문이라 할찌라도 하나의 이야기나 혹은 여러 이야기들이 그 배후에 혹은 그 안에 깔려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전형적인 강화체 스타일의 본문인 바울의 서신들에도 내러티브 요소가 분명히 깔려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리차드 B. 헤이즈는 갈라디아서 3:1-4:11을 근거로 바울의 서신들에 나타나 있는 내러티브 하부구조(narrative substructure)를 밝히는데 공헌을 하였다(Hays 1983). 그는 바울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을 진술하는 데 있어서 이야기나 이야기적 표현들은 원리상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전형적인 예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을 반박하면서, 바울 사상에 있어서는 이야기적 요소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드러냄으로서 그러한 일반적 인식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를 하였다. 헤이즈는 바울이 다양한 전통들을 절충하여 중요한 주제로 통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전통들을 내러티브 패턴의 구조 안에서 해석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81). 그는 바울의 사상은 그 밑에 깔려있는 내러티브 구조를 통하여 이해되어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제안하는 학자들을 여러 사람 소개하고 있는데, 와일더(Amos Wilder), 크라이트(Stephen Crites), 샌더스(James A. Sanders), 버드슬리(William Beardslee) 등이다(:9-13). 특히 버드슬리와 그의 공저자들은 여러 점에서 바울 서신에 나타나는 내러티브 요소들을 입증하기도 하였다(1989:136-42). 이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바울이 그의 교회들에게 기독교의 메시지를 전할 때 그 속에 이미 내러티브 형식(pattern)이 구축되어 있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140). 바울 서신에 적용된 동일한 원리가 성경의 다른 비이야기체의 부분들에 대하여도 주장될 수 있을 것이다. 메츠의 주장과 같이, 신약성경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 자료들은 그 안에 내러티브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Metz 1980:212). 

나아가서, 성경의 이야기체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의 비이야기체 본문의 해석학적 역할 또한 비이야기체 본문일지라도 이야기 본문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스트룹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비록 성경 전체가 이들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다할지라도, 성경의 가장 중요한 비이야기체 본문 가운데 어떤 부분은 어떻게 이들 이야기들이 해석되어야 할 것인가,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이들을 다시 읽는 공동체의 생활에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Stroup 1981:136). 스트룹의 이와 같은 관점에 근거하여, 엘링센 또한 성경의 비이야기체 본문들이 갖고 있는 해석학적 기능이라는 관점에 입각하여 성경은 이야기 통일체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주장한다(cf. Ellingsen 1990:22,29). 

요약하자면, 이야기가 성경전체를 압도하는 문학형식이라는 점, 그리고 비야기체 본문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 안에 드리워져 있는 이야기적 요소들, 그리고 비이야기체 본문들이 해석학적 기능으로서 이야기체 본문들과 맺고 있는 필연적인 관련성들에 비추어 전체로서의 성경은 이야기 통일체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이다. 

2) 성경의 신학적 목적

성경의 신학적인 목적을 고려할 때, 전체로서의 성경은 이야기 통일체로서의 성격을 갖는 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성경은 우리에게 자기 자신의 세계를 제시한다(Ellingsen 1990: 19). 그것은 하나님의 세계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경 안에는 낯선 신세계, 곧 하나님의 세계가 있다”(Barth 1957:33). 이 하나님의 세계의 임재 속에서 성경 저자들은 그들이 보고, 듣고, 받고, 이해한 것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도록 감동되어졌다. 성경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와 마주치게 되며,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드러나시는 것이다. 성경은 그 세계의 전역사(full history)를 증언함으로써,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계시의 전역사를 증거함으로써 하나님의 세계를 제시한다. 전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이 계시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의 정체성에 관한 계시, 곧 하나님은 누구이신가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누구이신가라는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행위의 양상이 밝혀져야 한다. 즉 그가 무엇을 행하셨으며, 그리고 무엇을 행하실 것인지가 그의 세계와의 관계성, 그리고 그의 백성과의 상호작용이라는 관점에서 밝혀져야 하는 것이다(cf. Thiemann 1985:112). 이리하여 하나님의 정체성 혹은 그의 세계는 따로 고립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역사적 상호작용이라는 맥락 안에서 제시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전체 사건은 하나님의 “구속적 사역(redemptive work)”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나는 총체적인 하나님의 행위의 양상은 하나님의 구속적 사역이라는 말로 요약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스트룹이 지적한 것과 같이, 이 구속은 환상이나 관념이 아니라,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근간을 둔 실체요, 또 현재와 미래에 계속하여 드러날 실체로서의 구속을 말하는 것이다(Stroup 1981:146). 한 마디로 하면 그것은 역사, 곧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이다. 그리고 이 역사는 궁극적으로는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의 수행”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이야기이다(Alter 1981:33).

“역사는 일어난 일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서 필연적으로 이야기 형식을 전제로 할 수 밖에 없다”(Stroup 1981:149). 그러므로 하나님, 그의 세계, 그의 계시의 전 역사, 그리고 그의 구속 사역의 전역사도 필연적으로 이야기에 의해서 그 정체성이 밝혀질 수 밖에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McClure 1988:150). 성경은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들과의 상호관계에서 나타내시는 행위와 목적들을 이야기함으로써 밝히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 성경은 그 안에 다양한 형식을 담아 다양한 경로로 이 큰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cf. Lindbeck 1984:120-21).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세계와 마주치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와 그의 구속사역의 이야기 혹은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위와 같은 점에서 우리는 전체로서의 성경의 성격을 하나님의 이야기를 말해주는 이야기 통일체로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어느 본문이 되었든지 그것은 최소한 이 더 큰 이야기 혹은 전체 이야기(master story)의 한 부분인 것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볼 때, 우리는 성경의 문학 형식으로서의 이야기체와 성경의 신학적 목적 사이의 불가분리의 관련성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을 압도하고 있는 문학 형식이 이야기체라는 것은 우연히 된 일이 아니다. 브루그만의 주장처럼, 이야기 형식과 이야기 되어야 하는 것의 본질 사이에는 중대한 연합이 있는 것이다(Brueggemann 1982:22). 사실 이야기들은 어떤 점에서 진리를 나타내는데 있어서는 가장 모호하고, 비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이야기가 성경저자들이 가장 많이 도입하여 사용한 문학형식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숙고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롱은, 역사가 어떻게 형성되게 되는가를 신학적으로 이해하게 될 때 그것은 한 예술가로 하여금 이야기를 하도록 한다고 주장하면서, 성경의 저자들이 이야기체를 주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역사인 성경을 기록하게 된 필연성을 강조한다(cf. 롱 1995:123-32). 그는 성경의 저자들은 그들이 기록한 이야기들을 진공에서 근거가 없이 뽑아낸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신학적 세계관과 그의 표현을 위한 문학 형식 사이에서 적합한 형식을 찾으려는 몸부림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이야기체의 문학형식은 성경의 저자들이 지닌 예술적인 자유와 그들의 신학적인 세계관이 상호작용을 한데서 비롯된 논리적 결과인 것이다(:125).” 그러므로 성경의 이야기체 문학형식은 저자들이 마음대로 창작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갖고 있는 더 큰 신학적 목적에 의하여 그들의 저술이 통제를 받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결과라고 보는 것이다. 이야기가 성경에 많은 것은 성경의 저자들이 단순한 저술가들이 아니라, 신학자들인 까닭이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성경에서는 이야기는 어떤 것을 서술하는 방법이 아니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표현 자체이다. 성경에서 저자들이 제일 먼저 수행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바를 역사 안에서 실현함으로써 이루신 결과”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써 나타난 것은 이야기에 관한 소견이나 감상이 아니라, 이야기 그 자체였던 것이다. 비이야기체 본문은 이 더 큰 이야기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성경의 틀을 형성하는 전체적인 이야기를 떠나서는 비이야기체 본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Long 1989b:37).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신학이 문학 형식을 자아내었다는 말이다. [preachers_spacer]

3. 한 이야기 안의 여러 이야기들 

성경을 이야기 통일체로서 이해할 때, 성경 안의 개별적인 각각의 이야기들은 더 큰 이야기인 하나님의 이야기와 별개로 분리하여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즉, 성경 안에 있는 각각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이야기의 일부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개별적인 이야기들도 그 자체의 독자적인 구성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자체로서 일체성(integrity), 구조(structure), 그리고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그 개별 이야기들은 더 큰 이야기, 혹은 전체 이야기(master story) 안에서 이야기 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다른 말로하면 성경의 이야기들은 “그 이야기(the story)” 혹은 “하나의 이야기(master story)” 안에 들어 있는 여러 이야기들인 것이다(stories within the story). 뿐만 아니라, 각각의 개별 이야기는 전체 이야기의 맥락에서 그 전체 이야기가 드러나도록 역할이 부여된 가운데서 이야기 되고 있는 것이다. 각각의 개별적인 이야기들은 그 자체가 독립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전체 이야기를 진행하는 과정에서의 또 하나의 작은 구성(minor plot)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개별적인 이야기든지 단순히 그 이야기 자체로서만 다루어져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이야기라는 더 큰 이야기의 맥락에서도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버드슬리와 그의 공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바울의 해석을 다루면서 이 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의 죽음은 단순히 예수의 죽음이라는 관점에서 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라는 관점에서도 이야기 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예수의 죽음 사건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라는 큰 이야기의 흐름 안에서 하나의 하부 구조(subplot)를 형성하며 이야기 되는 것이다(Beardslee 1989:142-51).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야기로서의 예수님의 죽음은 그것이 하나님의 구속 행위라는 큰 이야기 혹은 전체 이야기 안에서 조명될 때에야 가장 잘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어느 이야기든지 단순히 그 이야기 자체가 전부인 단일 이야기로서가 아니라, 실제로는 동시에 두 측면을 갖는 두 이야기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preachers_spacer]

4. 설교를 위한 함축들 

성경은 전체로서 하나의 내러티브 통일체라는 인식은 설교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사항을 시사하는 것이다. 실제로 엘링센은 성경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설교자가 성경의 비이야기체의 본문들을 다루는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해석학적 지침을 내포하는 것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것은 우리의 설교를 위한 아주 유익한 통찰 가운데 하나라고 강조한다. 성경이 전체로서 하나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통일체라는 사실은 우리가 구약의 많은 본문들, 서신서들, 그리고 계시록 등으로부터 선택된 본문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지와 그리고 그 본문들을 어떻게 성경 전체가 이야기 하고 있는 “그 이야기”, 즉 예수의 이야기에 연결을 시킬 것인가에 대한 어떤 방식을 우리에게 제안하기 때문인 것이다(Ellingsen 1990:22). 더욱 중요한 것은, 성경은 하나의 이야기 통일체라는 사실이 설교 자체의 본질과 기능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기준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성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내러티브 본질로부터 우리는 그것을 다시 이야기 하는 것인 설교도 당연히 내러티브 본질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도출해 내게 된다. 그리고 설교의 근본적인 과업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성경의 이야기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Ellingsen 1990:19). 성경이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다시 말하는 설교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는 것일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앞의 “한 이야기 안의 여러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성경의 어느 이야기든지 단순히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은 두 이야기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 두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신앙 공동체 안에서 자기 자신들의 이야기로 채택되는 것이다. (cf. Beardslee et all 1989:151-157) 이리하여, 버드슬리와 그의 공저자들은 성경의 이야기가 설교를 통하여 교회의 이야기가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우리의 설교 가운데서 성경의 특정한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로 진입해 들어와서 하나님의 이야기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초청한다. 이와 같은 참여를 통하여 우리의 이야기, 즉 우리의 정체성과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설교는 우리의 이야기를 하나님의 이야기로 통합시키고, 그러한 방식을 통하여 우리의 정체성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McClure 1988:150). 맥클루에 의하면 이것이야말로 설교의 내러티브 기능인 것이다. [preachers_spacer]

5. 성령론적 측면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인식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위에서 지금까지 논의한 문제는 피할 수 없이 성령의 역사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얼핏 보면 이야기를 말 하고 듣는 것이 듣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본질은 성령께서 우리의 이야기를 하나님의 이야기에 접목을 시키는 것이며 거기로부터 우리의 이야기에 변화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인 설교는 단순히 옛날이야기를 반복하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의 설교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그 이야기는 실제로는 변화된 새로운 실체를 창조하는 하나의 사건이(event)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야기를 이야기 하는 우리의 설교는, 그러므로 성령론적 행위인 것이며, 결국 성령께서 그 안에 능동적으로 간여하시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설교야말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성령론적 내러티브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on going pneumatological narrative process). 성경의 형성은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다른 인간 저자들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도 전체로서의 성경이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성경 형성의 첫 순간부터 성령의 간여가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3:16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임을 밝힘으로써 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성령은 이 전체 이야기의 신적인 화자(narrator)인 것이다.  [preachers_spacer]

BIBLIOGRAPHY 

정창균,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설교, 수원: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2002.
Long, Thomas G, 성서의 문학유형과 설교, 박영미 옮김.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5.
Pieterse, J.H.C. 설교의 커뮤니케이션, 정창균 옮김. 수원: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2002.
Achtemeier, Elizabeth 1980. Creative preaching: Finding the words. Nashville: Abingdon.
Alter, Robert 1981. The art of biblical narrative. London: George Allen & Unw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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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