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부활절 설교를 위한 본문탐구와 지침

부활절 설교- 본문탐구와 지침
본문: 고린도전서 15:50-58

1. 문맥 파악
본문은 부활장이라 알려져 있는 고린도전서 15장의 마지막 단락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15장은 전체가 부활에 대한 바울의 논의를 다루고 있다. 게다가 우리의 본문은 앞에서 다룬 긴 논의의 결론부분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본문을 설교하기 위해서는 앞뒤의 문맥을 간략하게나마 파악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이 펼쳐가는 부활 논의는 부활의 문제를 체계적으로 그리고 심도 있게 다루어야만 할 상황적 도전이 있었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당시에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12절). 교회 안에 육신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있다.

첫 단락(1-11절) 첫머리에서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재확인하면서, 자신이 전한 그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로 그 복음의 확실성을 선언한다(1-2절). 그리고는 자기가 전한 그 복음의 핵심을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으로 요약을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의 역사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는 부활한 그리스도를 육안으로 본 여러 증인들을 길게 나열하고 자신도 그 중의 하나라고 주장한다(3-8절). 그리고 자신의 사도됨의 근거도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나타나셨던 사실에 근거하고 있음을 변증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파한다는 점에서 다른 사도들이나, 바울 자신이나 동일하다고 선언한다(9-11절). 결국,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핵심이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이라는 것을 확고히 하는데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을 근거로 바울은 몸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하는 주장이 얼마나 헛된 믿음인가 하는 것과, 부활이 없다하는 것이 논리적으로도 얼마나 터무니없는 주장인가를 논증한다. 그는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곧바로 첫 단락에서 본 바와 같이 그렇게 확실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이 되며,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가 전한 복음도, 너희의 믿음도 헛것이요,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자들은 다 망한 것이요, 미래의 부활이 없다면 부활을 믿는 우리는 얼마나 비참한 자들인가를 강변함으로 죽은 자의 부활을 확증하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다(12-19절)

이어지는 다음 단락(20-3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를 믿는 우리에게는 우리의 미래의 부활의 확실한 근거와 보증이 됨을 논증함으로써 우리의 부활의 확증으로 나아간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첫 열매가 되었고,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부활하셨듯이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들이 부활할 것이고, 그리고는 세상의 완전한 종말이 올 것이다.

우리 믿는 자들의 부활을 논증한 바울은 이어지는 단락에서(35-49절) 그렇다면 이 부활체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데로 나아간다. 이미 죽은 자들, 이미 썩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다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다시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썩지 않을 것으로, 영광스러운 것으로, 강한 것으로, 신령한 몸으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몸으로 다시 살 것을 천명하는 것이다.

2. 설교를 위한 본문 주해

1)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다
이 단락(50-58절)만을 본문으로 삼아서 설교를 할 경우라면, 이미 앞에서 사도 바울이 강조해온 부활의 역사성이 이 본문에도 이미 전제되어 있음을 부각시킴으로써 이 단락에서도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라는 메시지를 한 대지로 설교에 포함시킬 수 있다. 물론 이 단락에서 사도는 직접적으로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놓고 다루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미 앞 단락들에서 다루었던 주제이다. 그러나 이 단락에서 부활을 논하는 그 근저에는 당연히 부활은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임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단락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라는 주제를 설교의 메시지로 포함시켜 선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본문에는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다는 것만 가지고 불충하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앞에서 사도가 반복적으로 “다시 살아남”을 강조하는 대목을 인용하면서 부활의 역사성을 강조해도 좋을 것이다(42,43,44절).

2) 부활은 변화의 사건이다(50-53절)
앞에서 육신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을 염두에 두고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문제를 단계적으로 논의해온 사도는 이제 매우 단언적인 선언으로(50절) 부활 논의의 결론부인 마지막 단락을 시작한다(50-58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썩은 것은 썩지 않은 것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혈과 육, 그리고 썩은 것과 썩지 않은 것의 대조를 굳이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 등 다른 실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구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요지는 이 땅에서의 모습 그대로의 몸은 변화되지 않은 그대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육체를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영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변화가 필수적임을 암시하는 선언이다.

그런데 사도는 곧이어 이 변화와 관련하여 놀라운 비밀, 곧 신비스러운 사실을 선포한다.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이 비밀, 곧 신비의 내용은 무엇이고, 그것이 비밀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 내용은, 우리가 영원히 죽은 채로 있을 것이 아니요, “눈 깜짝할 순간에(순식간에 홀연히)”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51절). 이미 죽어 썩은 자는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요, 아직 살아있는 몸은 그 순간 변화를 입을 것이다(52절). 이것이 바로 믿는 자의 부활이다. 그러므로 부활이야말로 이 변화를 일으키는 결정적 사건인 것이다. 그 순간에 아직 살아있는 자는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으로 변화할 것이다. 이것이 비밀인 이유는 이전의 역사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하심으로써 드디어 확고히 알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믿는 자들, 곧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는 자들에게만 알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 이러한 부활을 통한 변화의 사건이 성취될 것인가?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때이다(51,52절).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질 때 모든 죽은 자의 부활이 이루어지고, 그 순간에 홀연히 산 자와 죽은 자를 망라한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 질 것이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사도는 부활로 말미암을 이 변화의 진수를 다시 한번 진술한다.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53절) 여기의 “입는다”는 말의 의미를 혼돈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썩을 것을 그대로 두고 마치 옷을 입듯이 그 위에 썩지 않을 것으로 덧씌운다는 의미가 아니다. 썩을 것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썩지 않을 것으로 새롭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에 두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 부활은 미래에 반드시 일어날 확실한 사건이다.

3) 부활은 승리의 사건이다(54-57절)
사도는 이어서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는” 이러한 부활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선포하는 데로 나아간다. 그것은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던 말씀의 성취이다(54절). 이것은 이사야 25:8의 “주 여호와께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사도가 재량으로 부활의 의미로 해석하여 인용한 것이다. 사망이 승리에게 삼키워버리리라! 결국 부활은 사망에 대한 승리인 것이다. 사도는 이어서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는 호세아의 말씀(호13:14)을 인용하면서, 부활은 죄와 그로 말미암은 결과인 죽음에 대한 승리임을 감격에 차서 선포한다(55-57절). 이것은 부활의 본질이 죽음에 대한 최후 승리라는 확신에서 오는 승리의 함성이기도 하다. 사도는 이미 최후의 원수는 죽음이라고 천명한 바가 있다(26절).

그는 사망에 대하여 승리의 개가를 부르듯이, 그리고 마치 모든 인간을 사로잡아 다스리던 죽음을 조롱하고 비웃기라도 하듯이 외치고 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 그리고 그는 스스로 대답한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죽음은 마치 독충의 침처럼 치명적인 위력을 가지고 사람을 그의 세력에 눌러놓고 다스려 왔으며 어느 누구도 이 죽음의 문제를 극복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죽음의 문제는 죄의 문제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는 것이었다. 즉 죄의 결과로 죽음이 왔고, 죽음은 모든 인간들에 대하여 승리자로 군림해 온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죄가 그 세력을 떨치는 근거는 율법이다. 율법은 인간이 죄인임을 선언하고, 그 죄에 대한 정죄로써 죽음을 선고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어느 인간도 해결하거나, 극복하거나, 이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가 해결 된 것이다. 그러므로 57절은 “그러나”라는 말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절망적이던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러므로 54절에서 시작한 그의 승리에 찬 감격은 57절에서 다시 이러한 이김이 어디로부터 왔는가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 분. 우리의 미래의 부활의 확실한 근거가 되신 부활의 첫 열매! 그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이긴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이김!” 그리스도는 단순히 죽음을 극복한 정도가 아니라, 죽음 곧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 사망!”(26절)을 영원히 죽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죽음을 죽인 죽임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사도가 노래한 우리 자신에게도 주어진 승리의 근거와 원동력이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가 선포하는 “이김(승리)”인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른 사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이김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찬사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승리를 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4) 부활은 현재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사건이다
미래의 부활의 확실성과 죄와 사망에 대한 최후 승리로서의 그 부활의 의미를 선언하며 승리의 개가를 부른 사도는 이제 그러한 부활을 보장받고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현장으로 관심을 돌리며 긴 부활 논의의 최종 결론을 내린다.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을 보장받고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반드시 두 가지 모습이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야 한다. 사도는 그것을 강하게 권면함으로 그의 부활에 대한 논의를 끝맺는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58절). 부활을 보장받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첫째 부활 신앙에 있어서 이런저런 말들이나 시대의 흐름 등에 의하여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부활 신앙을 견고히 가져야 한다. 이것은 고백적 부활신앙이다. 둘째는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삶을 살아야 한다. 부활할 것이 확실하므로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처럼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32절)는 원리로 인생을 막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삶”을(33절) 살아야 한다. 현재가 전부인 것처럼 현실의 이해관계에만 얽매인 좁은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 부활 신앙을 갖고 더 크고, 더 길고, 더 높은 인생의 안목을 갖고 사는 사람이라면 훨씬 더 관용하고 인내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한 삶을 사도는 총괄하여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사람”이라고 요약한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을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는 지금까지 길게 논의한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 할 것이기 때문이요, 둘째는 우리가 부활 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다시 만날 것이요, 우리의 이 땅에서의 그러한 수고들이 결코 헛되지 않은 것임이 주님 앞에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몸의 부활에 대하여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는 것이 고백적 부활신앙이라면,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것은 실천적 부활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모습이 우리의 삶의 현장 가운데서 나타날 때 그것이 우리는 부활을 믿고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가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2절에서 사도가 지적한 “헛되이 믿음”은 단순히 몸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만이 아니라, 부활을 믿는 자로서 오늘 살아야 할 삶, 곧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로 살지 않는 것도 포함되는 것으로 결론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3. 설교를 위한 제안
1) 위 본문의 내용을 한편의 설교에서 모두 다루려하는 것은 자칫 설교를 지루하거나 산만하게 하는 위험 부담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의 중심 메시지를 무엇으로 할 것인지를 분명히 하고 그 주제를 중심으로 설교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

2) 위의 내용을 아래의 설교실제의 설교문과 같은 네 개의 대지로 구성하여 설교할 수 있을 것이다(부활은 역사적 사건이다, 부활은 변화의 사건이다, 부활은 최후승리의 사건이다, 부활은 현재의 삶을 요구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한 편의 설교에서 위의 4가지 항목을 다 담아서 설교하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주제의 명료성을 확보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필요하면 위의 각각의 대지를 한 편의 설교의 주제로 하여 네 번에 걸친 부활에 대한 연속설교로 수행하여도 좋을 것이다.

3) 본문의 어느 부분들은 그 자체가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강한 인상과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수사적 어법과 단어들로 기록되었으며, 대부분의 오래 된 신자들에게는 익숙한 문장들임을 염두에 두고, 본문의 단어 등에 대한 장황한 해설보다는 오히려 본문 자체를 그대로 설교 가운데 강하게 인용하는 것이 더욱 강렬한 인상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나타낼 수도 있을 것이다.

4) 청중에 따라 설교의 메시지의 근거가 되는 핵심 구절들을 쉬운 번역 성경을 인용하여 청중의 이해를 실감나게 하는 데에 중점을 둘 수도 있고, 개역 성경의 어투에 익숙한 청중의 경우에는 개역성경의 기록 그대로 인용하여 본문의 부활 메시지의 선포적 분위기를 설교에 살리는 데에 중점을 둘 수도 있을 것이다.

5) 설교 스타일은 설득이나 대화 스타일 보다는 진리의 선언과 선포적 혹은 고백적 스타일을 취하는 것이 부활절이라는 절기로서의 예전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6) 최후 승리로서 부활의 능력을 함성처럼 외친 다음 57절에서 사도 바울이 이러한 부활의 근거와 원동력이 어디에 있는가에 다시 집착하면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이러한 승리(이김)가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다시 확인하고 있음을 부각시키면서 아직 부활신앙을 갖지 못하였을 청중에게 복음 전도의 기회를 갖는 메시지를 선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러한 부활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강조하는 메시지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모습을 부각시키면서 우리에게 최후 승리의 부활을 보장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도록 회중을 격려하고 이끄는 메시지를 선포할 수도 있을 것이다.

7) 죽음에 대한 부활의 최후 승리가 개선가처럼 장엄하게 선포되고 있음을 부각시키면서 이러한 승리의 선언은 단순히 신자 한 사람의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교회 공동체의 온 세상을 향한 선언이라는 점도 덧붙여 부각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부활절은 바로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이 부활신앙을 확인하고, 공동체로서 이 믿음과 최후 승리를 선언하는 특별한 주일임을 알게 하여 모두가 이 예배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동일한 고백과 축제에 참여하도록 격려하여 신앙적 도움을 주는 시도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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